“방해될까 조용히 공부했죠”… 자립청년, 오늘의집에서 다시 시작

입력 2025-06-22 14:36 수정 2025-06-23 13:08
리모델링 전 할머니의 방 전경. 높은 책장과 쌓인 물건들이 시야를 가린 어수선한 공간. 침대 없이 매일 이부자리를 펴고 접으며 생활해야 했고, 좁은 이동 동선은 낙상 위험까지 안고 있었다. 부산시 제공

곰팡이 핀 책상, 뒤엉킨 가구, 테이프로 붙인 들뜬 장판. 문화재 수리 전문가를 꿈꾸는 20대 자립준비청년 김모 씨(25)의 방은 고단한 자립의 상징이었다.

30년 가까이 된 영구임대주택에서 그의 방은 함께 사는 친척할머니가 TV를 보는 공간이기도 했다. 김 씨는 삐걱거리는 책상에 앉아 국가유산수리기능자 자격시험 문제지를 펼쳤다. “방해될까 봐 늘 조용히 움직였어요. 먼지도 많고, 곰팡이 때문인지 목이 칼칼한 날도 많았죠.” 좁고 낡은 공간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려는 청년의 발걸음을 붙잡는 장애물처럼 느껴졌다.

리모델링 전 사연자의 방 전경. 김치냉장고와 TV, 컴퓨터가 함께 놓인 복잡한 구조. 침대 없이 좌식 생활을 이어가며 수면과 휴식이 불안정했고, 할머니와 PC를 함께 사용하는 애매한 공간 배치는 사적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부산시 제공

22일 부산시에 따르면 시는 자립준비청년의 열악한 주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청년러브:오늘부산’ 프로젝트를 시행 중이다. 보호 종료 후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생활 기반을 마련해주고자 기획된 사업이다. 단순한 벽지·장판 교체가 아닌, 청년이 체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시는 자립지원전담기관과 함께 대상자를 발굴했고, 민간 인테리어 플랫폼 ‘오늘의집’에 협업을 제안했다. 여러 차례 접촉 끝에 ‘공간이 삶을 바꾼다’는 철학을 지닌 오늘의집 콘텐츠팀이 참여를 결정했다. 오늘의집은 공간 설계부터 가구·가전 제공, 콘텐츠 제작까지 전 과정을 맡았고, 일부 시공비는 부산시 자립지원전담기관이 사회복지법인 월드비전과 연계해 마련한 후원금으로 충당됐다. 민·관·NGO 협력 모델이 실제 실행으로 이어진 사례다.

리모델링 후 사연자의 방. 공간을 분리하고 침대와 책상을 새로 배치해 공부와 휴식이 구분된 생활이 가능해졌다. 부산시 제공

김 씨의 방은 완전히 달라졌다. TV와 책상, 냉장고까지 섞여 있던 구조는 분리되고 정돈됐다. 김치냉장고는 주방으로 옮겨졌고, 방에는 침대와 책상이 제자리를 찾았다. 수납장과 커튼, 조명까지 조화를 이루며 처음으로 ‘김 씨만의 공간’이 완성됐다.

손정희 오늘의집 디자이너는 “할머니와 손자가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세대 공존을 고려해 설계했다”며 “정갈한 분위기와 안정적인 색조로 편안함과 집중력을 모두 담아냈다”고 설명했다.

리모델링 후 할머니 방. 햇살 드는 창가에 침대를 두고, 수납은 안쪽에 정리해 휴식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로 바뀌었다. 부산시 제공

김 씨는 “예전엔 그냥 잠만 자는 곳이었다면, 지금은 저를 받아주는 공간이 됐어요. 공간이 바뀌니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니 일상도 달라졌습니다”라고 말했다.

부산시는 2023년 자립준비청년 160명을 대상으로 한 수요 조사에서, 응답자의 65.7%가 주거비 지원을, 35.6%는 생활환경 개선을 가장 필요한 지원으로 꼽았다고 밝혔다. 하승민 시 미디어담당관은 “단발성 경제 지원을 넘어, 청년 삶의 질을 바꾸는 ‘질적 주거 개선’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이번 사업을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오늘의집 측은 “이번 프로젝트는 공간을 통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라며 “앞으로도 공공기관과 협업해 다양한 사회 문제 해결에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는 이 사업을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상시 지원 모델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현재 2차 대상자 1명을 다음 달 4일까지 모집 중이며, 이들의 공간은 8월 중 개선을 마치고, 9월 중 변화 과정을 영상 콘텐츠로 공개할 예정이다.

김 씨는 현재 국가유산 수리 기능자 자격시험을 준비 중이다. 언젠가 문화재 복원 기술자가 되어, 자신과 같은 처지의 후배들을 돕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는 “이 집에서라면,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고 말했다.

부산=윤일선 기자 news828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