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부터 뉴욕까지 ‘어쩌면 해피엔딩’의 10년은 마라톤 같았다”

입력 2025-06-15 10:21 수정 2025-06-15 13:47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박천휴 작가 ⓒNHN링크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6관왕의 영예를 안은 ‘어쩌면 해피엔딩’의 박천휴(42) 작가는 “두 문화를 오가는 창작자로서, 조금은 다른 관점이되 많은 분에게 공감을 끌어내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는 수상 직후 국내 언론과 진행한 서면 인터뷰를 통해 토니상 수상과 현지 반응에 대한 소감, 작곡가 윌 애런슨과의 오랜 파트너십, 뮤지컬 ‘일 테노레’의 재공연과 단편영화 제작에 대한 꿈 등 향후 계획을 밝혔다. 다음은 박천휴 작가와의 일문일답.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국내외 관객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해피엔딩’은 나와 윌 애런슨이 함께 만든 첫 오리지널 스토리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원작이 없는 세계와 캐릭터를 온전히 처음부터 만드는 일이 무척 즐겁기도, 두렵기도 했다.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특별히 모르겠다. 처음 쓰기 시작한 2014년부터 지난해 가을 브로드웨이 개막까지, 계속해서 다듬으며 완성도를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애를 썼다. 그게 이유라고 생각하고 싶다.”

-윌 애런슨 작곡가와의 협업 방식이 궁금하다. 오랜 파트너십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한국에서는 윌을 ‘작곡가’로 호칭하지만, 윌은 지금껏 나와 함께 극작도 해왔다. 미국에서는 우리 둘 다 ‘작가’ 즉, ‘쓰는 사람’이라고 호칭한다. 음표든 활자든 구분하지 않고 우리는 지금껏 계속 쓰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내가 먼저 생각한 아이디어라고 해도, 함께 이야기를 짓고, 음악의 정서와 질감을 정하고, 매일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협업한다. 협업자이기 이전에 17년째 매우 가까운 친구 사이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나 정서에 비슷한 면이 많다. 서로의 예술관을 존경하는 마음이 있다.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하다 보니, ‘내가 할 일’ ‘네가 할 일’을 구분하지 않고 늘 매우 가깝게, 유기적으로 함께 작업한다. 작업의 지난함과 고통, 즐거움, 그리고 한 작품을 끝냈을 때 느껴지는 성장도 거의 매 순간 함께하고 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박천휴(왼쪽)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 ⓒNHN링크

-브로드웨이 공연이 한국 공연과 다른 점은 무엇이고 차이를 둔 의도는?
“한국 공연과 규모가 다른 만큼 연출과 무대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한국은 무대전환이 거의 없는 반면 브로드웨이 공연에서는 매우 많은 무대전환과 효과가 쓰인다. 한국보다 배우의 숫자와 오케스트라의 악기 숫자 등이 조금씩 더 늘어났고, 한국 버전에는 암시만 되고 직접 보여주지 않았던 장면을 브로드웨이 버전에서는 추가하기도 했다. 반대로 축약되거나 생략된 대사와 넘버도 있다. 모두 오랫동안 수정 작업을 거치며, 최대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한 시도들이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에 대한 관객 반응은?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뉴욕으로 혼자 휴가를 온 미국 관객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분이 열 개의 공연 티켓을 예매했고, ‘어쩌면 해피엔딩’이 다섯 번째 공연이었다. ‘어쩌면 해피엔딩’을 보는 내내 집에 있는 아내가 그립고, 함께 손을 잡고 이 공연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고 한다. 결국 남은 다섯 개의 공연표를 팔고, 비행기표를 바꾸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아내를 일찍 보기 위해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밸런타인데이 선물로 아내와 함께 뉴욕에 와 다시 이 공연을 함께 보기로 했다는 글을 읽었다. 내게 직접 쓴 글은 아니었지만, 내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으로 느껴졌다.”

-토니상 수상 당일 어떤 하루를 보냈나? 수상의 의미와 이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미국 영화계처럼, 공연계에도 ‘어워즈 시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영화계가 비평가상, 에미와 골든글로브를 거치고 결국 피날레를 오스카 시상식에서 장식하듯, 공연계 또한 비평가상, 드라마 리그와 드라마 데스크를 거쳐 토니상까지 거의 석 달에 가까운 ‘어워즈 시즌’동안 무수히 많은 행사와 시상식에 참석하며 부지런히 작품을 홍보해야 했다. 내가 브로드웨이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가라 얼굴을 비추는 게 중요하다고 해서 내성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 악수를 하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토니상 무렵에는 석 달 동안 뛴 마라톤의 피니시라인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몸도 많이 지쳤다. 그래서 토니상 시상식에 가면서는 피곤함과 설렘, 걱정과 흥분 등 모든 감정이 뒤섞인 기분이었다. 시상식 자체도 레드카펫부터 마지막 작품상 발표까지 총 일곱 시간이 걸렸다. 수상 이후 한 명의 창작자로서 생활이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다. 지난 10년 동안 긴 마라톤 같았던 서울과 뉴욕에서의 ‘어쩌면 해피엔딩’ 작업 여정을 좀 더 뿌듯하게 마무리한 것 같아 기쁘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브로드웨이 공연.ⓒNHN링크

-‘어쩌면 해피엔딩’, ‘고스트 베이커리’와 같이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많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저 작가로서 내게 친숙한 세상과 정서를 이야기로 만들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이유였다. 스물다섯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기 때문에, 아직도 영어를 할 때 종종 한국식 액센트가 나온다. 뉴욕에 오니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훨씬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나와 윌이 만든 ‘일 테노레’의 1930년대, ‘고스트 베이커리’의 1970년대를 통해 한국 관객에게는 친숙하면서도 묘하게 낯선 질감의 세상을 선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해외 관객들에게는 낯설지만 묘하게 공감되는 세상을 선보이고 싶다.”

-‘일 테노레’와 ‘고스트 베이커리’ 등의 미국 공연을 언급했는데 구체적인 진행 상황은? 이 밖에 구상 중이거나 작업하고 있는 작품이 더 있는지.
“우선 ‘일 테노레’와 ‘고스트 베이커리’ 모두 영어로 가사와 대본 수정 작업을 할 계획이다. 이후 뉴욕 현지에서 제작자와 연출 등 좋은 파트너를 찾아야 하는 복잡한 작업이 남아있다. 몇 년 전 이야기를 완성해 놓은 단편영화가 하나 있는데, 뉴욕을 배경으로 한 한국인 커플 이야기다. 지금까지 공연에 더 몰두하느라 계속 미뤄뒀는데, 더 늦기 전에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충동이 희미해지기 전에) 영화를 꼭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다양한 국가에서 창작 기회가 있을 텐데, 앞으로 한국에서의 신작 등 활동 계획은?
“한국에서는 작년에 개막한 저희의 신작 ‘일 테노레’와 ‘고스트 베이커리’의 재공연을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아직 발표가 안 된 TV 드라마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작년 연출 데뷔작이었던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처럼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미 있는 작품을 번역하고 연출해서 한국 관객분들에게 선보이는 일도 계속하고 싶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작곡가 윌 애런슨(왼쪽), 작가 겸 작사가 박천휴가 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8회 토니상에서 음악상을 수상한 뒤 소감을 말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작가로서 궁극적인 목표가 있나? 어떤 창작자로 남고 싶은지 궁금하다.
“그저 어떠한 이야기를,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충동과 의지가 계속되는 한 꾸준하고 진중하게 작업을 이어가는 창작자가 되고 싶다. 살면서 서울과 뉴욕에서 보낸 시간이 이제 거의 50:50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두 문화와 언어를 오가는 창작자로서, 조금은 다른 관점이되 많은 분에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의미가 있을 이야기들을 만들고 싶다.”

-국내외 무대에서 성공을 꿈꾸는 한국의 젊은 창작자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공연을 만드는 일은 평균적으로 5년 이상 걸리는, 영화나 드라마보다도 긴 시간 매달려야 하는 일이다. 반면에 창작자 대우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훨씬 더 보잘것없는 게 현실이다. 빠른 성공을 위해 뛰어들기에 좋은 직업은 아닌 것 같다. 지금 흥행하는 공연들을 교과서처럼 따르기엔 아직 한국 뮤지컬이 산업화한 지가 그렇게 길지 않아, 충분한 교과서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창작진들이 쉽게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진심으로 이야기와 음악을 써서, 진정성 있는 제작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제작해야 버틸 수 있는 과정이다. 응원하겠다.”

-10월 한국 공연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국내 공연과 달라질 점이 있을지? 작품을 기다리는 한국 관객에게도 한마디 부탁한다.
“극장이 조금 더 큰 무대로 바뀌면서 시각적인 요소에 필요한 변화가 있을 예정이다. (극장을 옮기는 건 이미 몇 년 전에 결정된, 이번 토니상 수상과는 관련 없는 일이다) 2015년 트라이아웃(시범공연)으로부터 십 주년을 맞는 이번 공연은 그간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공연장에 맞춰 자연스럽게 다듬어질 예정이다. 또한 과거에 함께했던 배우들이 이번 무대에 다시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조심스럽게 가져보고 있다. 이번 십 주년 공연이 저와 윌뿐 아니라, 그간 이 작품의 여정을 함께해 주신 분들, 그리고 십 년 동안 공감해주고 응원해준 관객분들 모두에게 행복한 공연이 될 수 있도록 애쓰겠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