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국가 있었다면…홀로코스트 막을 수 있었을까

입력 2025-06-12 15:32
이스라엘 초대 총리 벤 구리온(가운데)이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브니엘 제공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자행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전 세계 유대인 인구 3분의 1에 해당하는 600만명이 희생된 이 비극적 사건으로 ‘여호와가 특별히 보살피는 민족’이란 믿음이 깨진 이들이 적잖았다. ‘다시는 도살당하지 않겠다’는 유대인의 각성은 훗날 이스라엘의 탄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당시 이들에게 나라가 있었다면 홀로코스트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미국 켄터키대 철학과 유대학 교수인 저자 올리버 리먼은 이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나치는 유대인의 이주가 아닌 절멸을 원했으며, 이들뿐 아니라 누구도 유대인 난민을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1930~40년대 팔레스타인 지역이 유럽의 모든 유대인을 수용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영국 대영도서관이 소장한 유대교 경전 중 하나인 ‘황금 하가다’에 그려진 이집트 탈출 직전 히브리인의 모습. 브니엘 제공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유대학과 동양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역사와 고정관념을 소개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해외 거주 유대인(디아스포라)이기도 한 그는 책에서 유대교를 설명하고자 성경 시대부터 현대 이스라엘 건국까지 이어온 유대인의 역사와 종교 관습을 망라한다. 특히 유대인이 2500여년간 “세계 문명의 타자”로 살며 얻은 편견의 진위와 그 배경을 깊이 파고든다.

이탈리아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에 새겨진 부조. 로마군이 1차 유대 반란을 진압하던 중 탈취한 유대교 상징인 메노라(촛대)와 성전 기물을 들고 입성하고 있다. 브니엘 제공

그가 유대인에 관한 진실과 오해를 해명하는 데 공들이는 건 세계 곳곳에서 꾸준히 반복된 이들의 잔혹사와 무관치 않다. 70년 로마군이 제2차 성전을 파괴한 이후 중동과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유럽 전역으로 이동한 이들은 각국에서 상인이나 금융가로 생활을 영위했다. 유대인이 이들 직업에 주로 종사한 건 당시 기독교인이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일이 금기였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1세가 1806년 유대인에게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는 모습을 묘사한 프랑스 판화. 브니엘 제공

유대인은 금융업으로 얻은 자본과 인맥으로 지도층과 유착해 부를 쌓았지만 일반 대중은 이들을 ‘돈 놀이꾼’으로 봤다. 유대인을 돈에 빗대는 관습은 이때부터 나왔다. 영국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 속 악역인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대표적 사례다. 저자는 이런 고정관념이 “홀로코스트의 지적 토대를 제공했다”고 본다.

저자는 “이스라엘에선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유대인과 아랍인이 대다수”라고 말한다. 유대인이라고 모두 전통을 중시하진 않는다는 얘기다. 사진은 이스라엘 경찰이 군복무에 항의하는 초정통파 유대인의 집회를 해산하는 모습. 브니엘 제공

‘유대인은 이스라엘로의 귀환을 항상 갈망한다’는 것 역시 저자가 꼽는 유대인 관련 고정관념이다. 그는 “유대교 전통적 기도나 예배에서 귀환이란 표현이 자주 사용되긴 하지만 이는 성전 재건과 관계가 있다”며 “유대교 개혁파는 귀환에 관한 열망을 비난하며 현재 사는 국가를 고향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봤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적잖은 디아스포라가 이스라엘로 귀환하지 않는 점을 그 근거로 든다. ”쉽게 달성 가능한데도 실현하지 않는 걸 보편적 열망이라 부를 수 없다”는 이유다.

저자는 ‘유대인은 인종인가’ ‘유대인은 영리한가’ 등에 대해 각각 “자칭타칭 유대인으로 여긴다면 그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이며 “현대 유대인은 전통 경전 교육을 받지 않으므로 유대교식 교육 때문에 똑똑한 사람이 많다는 건 지나친 비약”이라고 답한다. 아울러 ‘유대인의 여호와는 폭력적이고 질투심이 많을까’ 등의 쟁점에 관해서는 “구약성경엔 하나님이 분노하는 장면이 꽤 있지만 특정 구절에만 매달려 ‘이것이 유대교의 핵심’이라 주장하는 건 옳지 않다”며 “슬픈 구절 안에 기쁜 구절이 있고, 공격적 구절 옆에 온화한 구절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전쟁과 미국 내 반(反)유대주의 테러 등의 뉴스가 연일 이어지는 요즘, 유대교와 유대인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비교하며 유대교를 해설하는 등 비교적 객관적 시선에서 유대인을 다루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서울신학대 교수인 역자는 “저자는 유대인이 당연시하는 전통도 비합리적일 때는 과감히 지적한다”며 “유대교 핵심 주제와 종교 문화를 거의 빠짐 없이 다뤘다”고 평가한다. 다만 가자지구 참상이 2년 가까이 이어지는 가운데 “억압받은 민족이 억압자의 부정적인 모습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보는 저자의 시각은 아쉬움을 남긴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