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그때 두 아이의 엄마를 둔 엄마였다. 그래서 그 어머니의 하소연을 듣고 있을 때면 수차례 고민이 됐다. 그 자매에게 권고를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불구의 몸이지만 여자로서 꿈에도 갈망하던 사랑을 받는 그 모습이 얼마나 행복해 보였던지 모른다. 그래서 그 어머니의 불편한 심정을 전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녀의 맑은 눈망울에서 남녀의 사랑을 뛰어넘는 신성한 하나님의 사랑이 들여다보이곤 했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단 한마디도 그 어머니의 부정적인 권고의 말을 전하지 않았다. 늘 격려하고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 마음이 나의 본심이었기에 오히려 권사님에게 금식 기도를 권했다.
내가 존경하던 황 박사님은 딸의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셨다. 사위에게 미국 넓은 땅에 학문의 길을 열어 주었다. 아버지는 남은 삶을 딸에게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결단하신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그 가족이 미국으로 떠난 이후 나는 막내 아이를 해산했다. 6개월이 지난 후 본사의 간절한 권유로 남편의 건설 현장인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잠시 우리 가족은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남편은 60년대 서울공과대학 토목과를 졸업하고 독일인 회사에 입사해 토목설계와 공사견적, 해저 터널 공사까지 쉼 없이 연구하며 노력한 인재였다. 회사에 입사해 부장자격을 가진 경력자라야 통과 할 수 있는 토목고등고시라는 기술사에 합격해 기술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회사에서 맡은 일이 더욱 많아 가족과 함께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국제무대에서 가장 절실한 영어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S 공대라고 자부하는 서울공대의 꿈을 이루었으나 우리나라가 최빈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은 오직 해외 건설을 통해 달러를 벌어들이는 길밖엔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 당시 열리고 있는 건설시장의 붐을 우리나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중동과 동남아 등의 무수한 현장을 선진국에 빼앗기면 근면하고 희생정신으로 단련된 우리 민족은 선진국들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다니는 도우미로 전락한다면서 우리 대한민국이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앞으로 20~ 30년 쉼 없이 20~30대가 피땀을 흘려야만 한다는 굳은 신념이 남편의 가슴에 담겨 있었다.
그 시절 남편에게 맡겨진 건설현장이 인도네시아 수라바야 밀림지대에 고속도로를 만들어 주는 범국가적인 위대한 일이었다. 헬리콥터를 타고 밀림지대를 돌면서 견적을 내느라 서울에 도착하면 견적팀 들과 외국인들이 함께 협업하며 수개월 인도네시아를 드나들었다. 남편은 현장을 위해 내게 기도 부탁을 하곤 했다. 우리나라 기술팀과 현지인 노무자까지 거의 3000여 명이 넘는 큰 현장이었다. 남편의 임무를 염려하며 기도했던 그 날이 엊그제의 일 같기만 하다..
<날계란처럼>
- 김국애
부딪치지 않으려
살살 굴러다니는 날계란
장애물이 가까우면 피하고
상대를 거슬릴 줄 모르는
자양분 가득한 내면을 안고
거추장스러움이 없는 외형
간결함의 대명사다
부딪치면 깨지는 것 누가 일러줬나
생존을 위해 스쳐가는 지혜
어리석음이 아니다 유약함도 아니다
가득 채워짐이 부요함이라면
무한한 자유는 비움에 있다는 것
비워낸 계란껍질을 이름일까
무엇을 더 이상 비우겠는가
충만할 때는 알 수 없다
가난한 자 협박받을 일이 없다니
풍요의 축복이 채워짐이라면
청빈함은 비움의 축복이라는
천금같은 천부의 가르침이다
◇김국애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계간 현대수필 운영이사, 수필집 ‘길을 묻는 사람’ 저자. 이메일 gukae8589@daum.net
정리=
전병선 선임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