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기간 ‘인공지능(AI) 3대강국 도약’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우며 AI 기술을 중심으로 한 미래 성장을 약속했다. 전문가들은 AI가 급격히 부상하고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이 본격화하는 중대한 변곡점 시기를 맞은 한국이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기술 혁신의 첫 단추로 ‘규제 혁파’를 꼽았다. 기술이 이미 충분하지만 산업화 단계에서 발목을 잡는 규제 병목이 먼저 해소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강성진 한국경제학회 수석부회장(고려대 경제학부 교수)은 11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혁신 생태계가 성과로 이어지게끔 규제 환경을 개선하는 게 급선무”라고 제언했다. 강 부회장은 “이미 한국은 벤처기업 등을 중심으로 기술이 일정 수준에 이르렀지만 규제 때문에 정작 산업화에 이르지 못한다. AI, 모빌리티 분야가 개인정보 규제로 국내 실증과 상용화가 어려운 게 대표적이다”고 지적했다.
전임 정부는 ‘나눠먹기식 연구개발(R&D)’ 관행을 문제 삼으며 지난해 33년 만에 관련 예산을 처음으로 삭감했고, 올해는 이 예산이 삭감 이전과 비교해 80% 수준까지 복구된 상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예산의 비효율적인 배분에 앞서 성과를 가로막는 규제가 혁신 생태계를 왜곡하는 원인이라고 강조했다.
강 부회장은 “기술이 있어도 규제 탓에 산업화로 이어지지 않으니 결국 단기성과 중심의 과제만 반복되고 도전적이거나 장기적인 연구는 설 자리를 잃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전 정부는 성과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예산을 줄였지만, 문제의 본질은 ‘성과가 날 수 없는 구조’에 있다”며 “규제 혁파 없이 예산만 단순 투입하면 혁신 생태계는 더 망가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규제 혁신을 위한 구체적 해법도 제시했다. 강 부회장은 “타다 사례에서 보듯, 신산업이 도입되는 초기 단계에서는 기존 이해단체 중심의 ‘기득권 카르텔’에 대응할 정부의 리더십이 핵심”이라며, “단순히 갈등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정책 방향을 명확히 세우고 어떻게 설득하고 타협해갈지에 대한 전략을 정부가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규제를 ‘네거티브 방식(법률, 정책에서 금지된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신속히 전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존 규제 샌드박스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며 “이 제도는 4년간 유망한 기업과 신기술·신상품에 대해 규제를 유예해주는 것이 핵심이지만, 문제는 그 4년이 끝난 이후”라고 지적했다. 그는 “4년 기한이 끝난 규제샌드박스 적용 기업과 상품에 대해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유효기간을 연장하는 방향의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기술 실험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정부가 유인과 설계의 관점에서 규제 구조를 다시 짜야한다”며 “미국은 신기술을 실험하다 문제가 발생해도 일정 부분 법적 책임을 면제해주는 방식으로 혁신의 여지를 확보한다”며 “한국은 소비자 보호와 법적 책임 구조가 강해, 신기술을 시험할 기회조차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기술혁신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인재 양성 전략도 함께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부회장은 “기존 인력을 재교육해 실무에 바로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 훨씬 현실적이고 효율적”이라며 “반도체 인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새 학과를 만드는 식의 접근은 시차가 커 효과를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수도권 관련 대학 과의 정원을 늘리는 방식도 오히려 정책 흐름에 역행하는 측면이 있다”며 “지금 있는 학생들이 산업 수요에 따라 유연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양 교수는 “우수 기술인력이 주로 대도시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점을 감안해 생산시설은 가능하면 대도시 근처에 조성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외곽에 설립해야 한다면 출퇴근 접근성 같은 현실적인 대책도 함께 마련돼야 인재를 유치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어 그는 “특히 해외 연구자 유치를 위해서는 이들이 지방 거주가 어려운 만큼 연구시설은 대도시 인근에 조성돼야 한다”며 “충분한 연봉과 자녀 교육 지원, 해외 수준의 연구환경도 갖춰야 유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궁극적으로 기술 혁신이 장기적 안목의 거버넌스 체계 속에서 일관되게 추진돼야한다고 조언했다. 안 교수는 대만의 TSMC 사례를 언급하며 “모리스 창은 TSMC 설립 당시 대만 정부로부터 재량권을 위임 받으며 30년 넘게 안정적으로 기업을 키웠다. 단기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장기 비전과 전략 수립을 맡긴 것”이라며 “전문가 1~2명을 발굴해 산업 설계를 장기적으로 맡길 수 있는 근본 거버넌스 재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양 교수는 “한국의 기술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 기조와 예산, 제도적 지원이 단절되는 불안정성”이라며 “정치적 변화와 무관하게 정책이 지속될 수 있도록 여야 합의를 통한 장기적 거버넌스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 부회장은 “성과가 당장 나오지 않더라도 실패를 감수하며 지속할 수 있는 ‘장기 R&D’ 구조를 갖춰야 한다”며 “다만 평가 체계는 철저히 운영해 단순한 예산 나눠주기로 흐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기초과학 투자”라며 “당장은 눈에 띄는 성과가 없더라도, 일본처럼 장기적인 기반을 다져야 기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세종=김혜지 기자 heyj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