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공포와 긴장으로 숨죽인 ‘천사들의 도시’…밤이 되자 군사작전지 방불

입력 2025-06-10 16:09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서 9일(현지시간) 경찰관들이 시위대에 맞서 도로를 통제하고 있다.

9일(현지시간) 오후 10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다운타운의 한 호텔 앞. 진압 장비로 중무중한 경찰들이 도로 곳곳을 통제하면서 군사작전을 진행 중인 듯한 삼엄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경찰들은 헬맷과 방독면, 소총으로 무장하고 거리 곳곳을 막아섰다. 낮은 고도로 날아다니는 여러 대의 헬리콥터는 서치라이트를 이곳저곳에 비췄다. 일상적인 모습이었던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LAX)에서 불과 30분 떨어진 이곳에서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서 9일(현지시간) 경찰관들이 시위대에 맞서 도로를 통제하고 있다.

중무장한 경찰들과 30m 정도 떨어진 곳에 집결한 시위대 속에 만난 폴라는 ‘이민세관단속국(ICE)는 LA에서 나가라’라는 팻말을 들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멕시코계 부모를 둔 그는 “이민자들은 미국의 중추다. 우리 자신과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나왔다”며 “트럼프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지금 우리나라를 파괴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9일(현지시간) 열린 시위에 참여한 폴라가 '이민세관단속국은 LA에서 나가라'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서 있다.

폴라는 특히 해병대 700명이 LA에 투입된다는 보도를 듣고 매우 놀랐다고 했다. 그는 “사실 점점 위험해지는 것 같다. 해병대가 와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게 가장 두렵다”며 “해병대는 중동에서 전쟁을 치르는 데 익숙하지, 민간인과의 전쟁에는 익숙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불법 이민 단속 반대 시위는 나흘 째를 맞으면서 해가 지기 전까지는 상대적으로 차분하게 진행됐다. 뉴욕타임스는 “LA 경찰이 시내에서 일부 체포에 나섰지만 시위대가 101번 고속도로를 잠시 폐쇄했던 8일에 비해 시위대와 경찰 사이의 충돌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LA 도심은 날이 저물자 긴장이 고조됐다. 경찰은 시위대 해산을 위해 섬광탄과 고무탄을 발사했다. 시청과 ‘리틀도쿄(일본계 미국인 커뮤니티)’ 인근에 밀집한 시위대는 마스크를 쓴 경찰과 대치하다 순찰차가 다가오면 이리저리 흩어졌다. 일부 시위대는 경찰을 향해 폭죽으로 추청되는 물체를 던지기도 했다. 시위대 중 십여 명은 손을 뒤로 묶인 채 경찰에 연행됐다고 CNN은 전했다. 거리에서는 공포탄과 최루탄, 순찰차 사이렌 소리, 헬리콥터 비행 소리 탓에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일상에서 쉽게 들을 수 없는 소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서 공포를 자아냈다.

한국계 미국인인 새러는 경찰의 도로 통제 여파로 길을 헤매는 이들에게 먼저 말을 걸며 길을 안내했다. 그는 “이 주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을 지원하고 모두가 안전한지 확인하기 위해 나와 봤다”며 “이민자들은 범죄자가 아니다. 그들은 더 나은 삶은 찾으려는 가족들이다. 트럼프는 범죄 혐의도 없이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쫓아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LA는 말 그대로 스페인어 ‘로스앤젤레스(천사들)’에서 따왔다. 이민자들이 세운 도시”라며 “멕시코 이민자, 한국 이민자 등 이민자들이 이 도시를 건설했다. 그래서 나는 트럼프가 잘못하고 있고 악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서 9일(현지시간) 무장한 경찰관들이 한 호텔 입구 앞에 서 있다.

경찰이 도로 곳곳을 통제하고 복면을 쓴 시위대가 뛰어다니면서 일반 시민들은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아시아계인 차량 공유 서비스 기사는 기자에게 “도로를 통제하고 있어서 더 이상 가기 어렵다. 절대 돌아다니지 말라”며 “미국에 10년 살고 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트럼프가 잘못하고 있다”고 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은 겁먹은 얼굴로 경찰이 통제하는 도로를 이리저리 우회하며 목적지를 찾았다. 호텔 입구까지 소총을 든 경찰들이 진을 쳤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의 한 건물 외벽에 9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민세관단속국(ICE)를 비난하는 낙서가 쓰여져 있다.

이번 이민 단속에서 멕시코계가 이민세관단속국(ICE)의 집중 표적이 된 탓인지 시위대 중에서는 멕시코 국기를 흔드는 이들이 많았다. 도심 건물 외벽에는 트럼프와 ICE를 욕하는 낙서가 잔뜩 쓰여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지난 6일 이후 계속되는 시위와 트럼프 행정부의 초강경 대응으로 초여름의 활기가 돌아야 할 ‘천사들의 도시’는 점점 공포와 두려움에 잠식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글·사진 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