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오후 서울 대학로 극장 온. 예술경영지원센터가 2~6일 개최한 ‘2025 K-뮤지컬국제마켓’ 프로그램 중 하나로 ‘글로벌 피칭-일본’이 열렸다. 지난해까지는 국내 제작사들이 작품을 국내외 프로듀서들에게 소개하는 ‘뮤지컬 피칭’에 올해 일본 제작사들이 참여하며 신설된 프로그램이다.
‘글로벌 피칭-일본’에는 도호, 호리프로, 극단 시키, 극단 팁탭, 극단 잇츠폴리스 등 5곳이 참여해 각각의 회사(극단)와 작품을 소개하고 넘버 1~2곡을 불렀다. 일본 뮤지컬계의 빅3 제작사인 도호, 극단 사계 그리고 호리프로는 최근 선보였거나 개막을 앞둔 신작을 소개했고, 중소 극단인 나머지 두 곳은 대표 레퍼토리를 소개했다.
특히 도호가 소개한 작품은 오는 9일 도쿄에서 개막하는 신작 ‘이태원 클래스’로, 드라마로도 잘 알려진 한국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했다. 이 작품에는 한국 뮤지컬 작가 이희준이 일본 작가와 함께 각본 작업에 참여했으며 한국계 미국 작곡가 헬렌 박이 작곡을 맡았다. 또 지난 2월 한국 웹툰 ‘미생’을 한국 창작진과 함께 동명 뮤지컬을 만들었던 호리프로는 이번 8월 개막하는 신작 ‘한 남자’를 소개했다. ‘한 남자’에 한국 창작진은 참여하지 않았지만, 호리프로는 이번에 한국 뮤지컬 배우들을 캐스팅해 2곡을 한국어로 선보였다. 도호와 극단 시키 역시 한국 배우나 한국어가 가능한 일본 배우들을 쇼케이스 무대에 세웠다.
‘글로벌 피칭-일본’을 비롯해 올해 K-뮤지컬국제마켓에 참가한 일본, 중국, 대만 등 아시아 프로듀서들의 참여 규모나 태도를 보면 한국 뮤지컬계가 그동안 꿈꾸던 ‘원 아시아 마켓’이 현실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뮤지컬계에서 원 아시아 마켓은 한국, 일본,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뮤지컬 콘텐츠를 공동 제작․투자․유통하는 협력 생태계를 가리킨다. 지난 2010년 CJ그룹 내에서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부분을 통합하고 글로벌 컨텐츠 컴퍼니로의 성장을 목표로 하면서 뮤지컬과 관련해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원 아시아 마켓’은 CJ E&M이 2010년 처음 제시한 개념
당시 한국은 창작 뮤지컬의 빠른 성장에도 불구하고 공연계 내수 시장이 작고, 중국은 큰 내수 시장에 비해 창작진과 기술진 부족으로 성장이 더뎠다. 그리고 일본은 라이선스 뮤지컬 중심으로 시장이 성장했지만, 정체기에 접어든 상태였다. 원 아시아 마켓은 이들 한․중․일 3개국에 필요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구상이었다. 특히 K-팝, K-드라마, K-영화 등 여러 콘텐츠 부문에서 ‘한류’가 세계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만큼 CJ E&M(현 CJ ENM)은 뮤지컬도 글로벌 유통 중심으로 사업을 전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장기적으로는 뮤지컬의 중심인 영국이나 미국과 차별되는 아시아 콘텐츠를 제작해야 한다고 봤다.
이를 위해 CJ E&M은 2010년 중국에 지사를 내고 이듬해 중국 문화부 산하 중국대외문화집단공사, 상하이동방미디어유한공사와 함께 합자법인 ‘아주연창’을 설립했다. 아주연창은 2011년부터 ‘맘마미아’ ‘캣츠’ 등 영미 뮤지컬의 중국 라이선스 버전을 선보이는 한편 2013년부터 ‘김종욱 찾기’ ‘총각네 야채가게’ ‘쓰릴 미’ 등 한국 뮤지컬의 라이선스 버전도 잇따라 제작했다. 그리고 중국 극작가 겸 연출가 류춘, 한국의 작곡가 박정아, 무대디자이너 김태영 등 양국 크리에이터들이 참가한 한중합작 뮤지컬 퍼포먼스 ‘공주의 만찬’을 선보이며 창작진의 교류를 촉진했다. 하지만 중국 뮤지컬 시장의 성장이 더딘 상황에서 2016년 사드 배치 결정에 따른 한한령마저 나오자 아주연창도 문을 닫았다. CJ E&M 역시 중국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그런가하면 CJ E&M은 일본에서 2011년 쇼치쿠와 공동으로 선보인 ‘미녀는 괴로워’를 시작으로 현지 제작사들과 업무 협약을 맺고 한국 뮤지컬을 무대에 올렸다. 일본 공연 티켓예매사이트로 유명한 제작사 피아(PIA)와 함께 2012년 말부터 2013년 초 사이에 ‘광화문 연가’와 ‘베르테르’를 올렸으며, 아뮤즈 엔터테인먼트와는 2013~2014년 사이 1년간 ‘카페인’ ‘풍월주’ 등 7편을 선보였다. 하지만 K팝 스타 없이 한국 뮤지컬 배우들이 출연한 이들 공연은 대부분 흥행에 실패했다. 게다가 한일관계까지 악화되면서 일본에서 한국 뮤지컬의 공연은 급속히 줄었다. 이후 CJ E&M은 뉴욕 브로드웨이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뮤지컬 투자 및 제작 참여에 집중하게 된다.
2010년대 후반 K-뮤지컬의 해외 진출 본격화
CJ E&M이 처음 제시한 ‘원 아시아 마켓’은 국내 뮤지컬계에서 2010년대 중반까지 이상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CJ E&M이 일본과 중국에서 철수한 뒤 다른 국내 제작사들의 잇다른 진출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앞선 경험과 시행착오를 반면교사 삼아 한국의 웬만한 대학로 뮤지컬들이 앞다퉈 중국과 일본에서 라이선스 공연된 것이다.
중국의 경우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는 2022년부터 지금까지 40편 안팎의 한국 창작 뮤지컬이 라이선스 공연됐다. 한국에서 유학한 중국 기획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미아 파밀리아’(중국명 ‘아폴로니아’)는 2020년부터 ‘미오 프라텔로’(중국명 ‘산타루치아’) 같은 작품은 장소특정형으로 오픈런 공연 중이다. 또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연간 10편 안팎의 한국 작품을 올리고 있는 일본은 중국과 비교할 때 중대형 한국 뮤지컬의 라이선스 공연을 꾸준히 올리는 것이 특징적이다. 2017년 도호와 호리프로가 공동으로 선보인 ‘프랑켄슈타인’을 시작으로 우메다 예술극장의 ‘마타하리’,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사랑의 불시착’ 등이 최근까지 꾸준히 공연됐다. 이는 중대형 극장을 보유한 일본의 대표적 제작사들이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은 창작 뮤지컬 제작 노하우가 축적된 한국 창작진과의 작업에도 적극적이다. 특히 중국은 뮤지컬 시장의 빠른 성장에도 불구하고 창작진이 부족해 더욱 손을 내밀었다. 라이선스 뮤지컬 제작부터 시작해 아예 신작을 제작할 때 한국 제작사와 공동제작하거나 한국 창작진을 초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2018년 초연한 뮤지컬 ‘랭보’는 한국 제작사 라이브㈜가 중국 제작사 해소문화와 공동제작해 양국에서 동시에 공연을 올렸다. 중국 배우들과 협력 연출가가 서울에 와서 한국 창작진 및 배우들과 함께 연습한 덕분이다.
한·중·일 뮤지컬계의 공동제작과 창작진 협업 증가
창작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극작가 겸 연출가 오세혁은 2022년 중국 라이선스 공연을 직접 연출한 이후 현지 제작사 및 창작진과의 협업에 적극적이다. 오세혁이 이끄는 제작사 네버엔딩플레이는 2023년 중국 뮤지컬 ‘킹스 테이블’을 한국에서 리딩 쇼케이스로 선보인 데 이어 지난해에는 중국 제작사 포커스테이지와 중국 뮤지컬 ‘접변’ 라이선스 공연을 올렸다. 네버엔딩플레이는 최근 중국 창작자 10명 정도와 함께 작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난 5월 23일부터 오는 14일까지 상하이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 양국에서 공연된 한국 뮤지컬의 낭독 공연 및 창작자들과 만나는 시간으로 구성된 ‘K뮤지컬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오세혁 네버엔딩플레이 대표는 “중국과 작업하면서 현지 재능있는 창작자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제 기획 단계부터 양국 창작진이 협업하는 작품을 만들려고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한편 일본에서는 아뮤즈의 한국 법인이 2023년 한국 창작진과 만든 뮤지컬 ‘오즈’가 눈에 띈다. 2021년 한국뮤지컬협회 ‘창의인재동반사업’ 대본 리딩 쇼케이스에서 직접 이 작품을 발탁한 아뮤즈는 인큐베이팅을 거쳐 무대에 올렸다. 이 작품은 한국에 이어 이듬해 중국과 일본에서도 각각 현지 언어로 공연됐다. 그리고 호리프로는 지난 2월 선보인 ‘미생’을 한국 작가 박해림, 작곡가 최종윤, 연출가 오루피나와 함께 만들었다. 일본의 경우 중국보다 늦었지만 최근 한국 창작진과의 직접 접촉을 늘려가고 있다. 도호는 지난해 한국 작곡가 최종윤과 극작가 한정석을 초청해 일본의 프로 및 아마추어 뮤지컬 창작자들과 3주간 워크숍을 가졌다. 그리고 여기에서 선정된 창작자들의 작품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뮤지컬 ‘빈 센트 반 고흐’ ‘라흐마니노프’ 등을 중국과 일본에 라이선스 판매한 바 있는 한국 제작사 HJ컬쳐는 지난해 10월 일본 도쿄에 지사를 설립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시작한 ‘일본 K-콘텐츠기업지원센터’에 입주한 HJ컬쳐는 현재 TV아사히와 뮤지컬 ‘살리에르’의 라이선스 버전 공연을 시작으로 일본 제작사와 체계적인 협력에 나설 예정이다. 한승원 HJ컬처 대표는 “일본 제작사의 경우 한국보다 제작 준비 기간이 빠르다. 현지화를 위해서 2~3년 전부터 이들 제작사와 함께 준비하는 것이 필요해서 지사를 세우게 됐다”면서 “아직 밝힐 수는 없지만, 현지 회사들과 공동제작 등도 협의 중이다. 이제 한국 뮤지컬계도 글로벌한 비즈니스 전략을 장기적으로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3국 협력할 수 있는 IP 플랫폼과 공동 시상식 제언
이런 과정을 거친 덕분에 올해 ‘K-뮤지컬 국제마켓’은 한국을 중심으로 원 아시아 마켓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특히 대학로에서 처음 시작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각종 상을 휩쓸며 9일 열리는 토니상 시상식에 10개 부문 후보로 올라간 것은 한국 뮤지컬계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덕분에 이번 ‘K-뮤지컬 국제마켓’에는 참가자(창작자, 제작자, 실연자 등 모두 포함)가 3387명으로 지난해 2542명보다 대폭 늘었다. 특히 제작자의 경우 일본에서 60여명, 중국에서 20여명, 대만에서 20여명 참가해 한국 뮤지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지난 5일 열린 아시아 뮤지컬 포럼에서 일본과 중국 프로듀서들은 한·중·일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날 이성훈 쇼노트 대표는 “3국이 함께 등록·공유하며 공동 개발 및 제작할 수 있는 콘텐츠 IP(지식재산권) 플랫폼 구축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3국 제작사들의 협업을 빠르게 그리고 간편하게 진행할 수 있다”면서 “특히 영미 뮤지컬과 구분되는 아시아향(向/香) 소재 개발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또 지난해 뮤지컬 ‘팬레터’의 라이선스 버전으로 일본과 중국에서 9개 상을 받은 강병원 라이브㈜ 대표는 “원 아시아 마켓 촉진을 위해 3국에서 만들어진 뮤지컬에 대해 함께 공동 시상식을 연다면 대중과 시장의 관심을 확산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원 아시아 마켓의 현실화에는 한국 뮤지컬 제작사들의 노력과 함께 공적 지원도 큰 역할을 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과 라이브㈜가 국내는 물론 해외 진출을 목표로 작품을 개발하고 지원하는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를 201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것이나 예술경영지원센터가 2016년부터 한국 뮤지컬의 해외 진출을 위해 여러 나라에서 쇼케이스를 여는 ‘뮤지컬 로드쇼’가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예술경영지원센터가 2021년부터 주최하는 ‘K-뮤지컬 국제마켓’은 아시아 각국은 물론 영미권 프로듀서들이 모여 네트워킹하고 작품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는 플랫폼으로 자리잡았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