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균기자가 만난 사람]‘3년만의 절절한 우승’ 정윤지 “스스로를 그만 괴롭히고 여유로운 골프 하겠다”

입력 2025-06-06 06:00 수정 2025-06-06 06:00
지난 1일 경기도 양평군 더스타휴 골프앤리조트에서 끝난 KLPGA투어 sh수협은행 MBN 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정윤지. KLPGA

프로 데뷔 첫 승의 길도 멀고 험했지만, 두 번째 우승 또한 그 못지않게 지난했다.

지난 1일 경기도 양평군 더스타휴 골프앤리조트(파72)에서 막을 내린 KLPGA투어 sh수협은행 MBN 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정윤지(24·NH투자증권) 얘기다.

2022년 E1 채리티 오픈에서 생애 첫 우승한 이후 3년 만에 들어 올린 통산 두 번째 우승 트로피였다. 사흘간 선두를 내주지 않은 와이어투와이어 우승이었지만 과정은 피를 말리는 접전이었다.

4타차 단독 선두로 최종 라운드에 임했을 때만 해도 정윤지의 낙승이 예상됐다. 그러나 마지막 날 이채은(25·메디힐)이 6타를 줄이는 무서운 뒷심으로 맹추격전을 펼치면서 결과는 그야말로 장갑을 벗어 봐야 알 수 있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앞서 경기를 마친 이채은과 공동 선두로 맞이한 마지막 18번 홀(파5), 버디를 해야만 우승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정윤지는 4.5m가량의 챔피언 버디 퍼트를 성공시키며 경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쥔 채 평소에 볼 수 없었던 격한 세리모니로 통산 2승째를 자축했다.

대회를 마친 뒤 정윤지는 “우승을 결정짓는 퍼트가 들어간 순간 그동안 마음 고생을 씻어내게 돼 저절로 나온 행동이었다”라며 “우승이 없었던 지난 3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기어이 해냈다는 안도감이 들어 너무나 기뻤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윤지의 포텐셜과 아마추어 경력을 감안했을 때 그가 KLPGA투어 데뷔 이후 5년여간 우승이 두 차례밖에 없다는 건 의외가 아닐 수 없다.

국가대표 출신인 정윤지는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유해란(24·다올금융그룹), 임희정(24·두산건설)과 함께 단체전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일찌감치 될성부른 떡잎으로 분류됐다.

2019년 드림투어 상금랭킹 5위로 그 이듬해인 2020년에 KLPGA투어에 입성했을 때만 해도 그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하지만 결과는 그러지 못했다. 아시안게임 멤버인 유해란과 임희정은 말할 것도 없고 박현경(24·메디힐) 등 동갑내기인 2000년생들이 투어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첫 우승의 감격도 데뷔 3년째인 2022년 시즌이 돼서야 맛봤다. 그것도 다른 3명과 5차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거둘 수 있었다. 3년에 한 번꼴로 거둔 두 차례 우승 중 쉬운 우승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난 1일 경기도 양평군 더스타휴 골프앤리조트에서 열린 KLPGA투어 sh수협은행 MBN 여자오픈 마지막날 18번 홀에서 우승을 결정짓는 버디 퍼트를 성공시킨 뒤 정윤지가 포효하고 있다. KLPGA

그가 우승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담담하게 소감을 말하다 가족들에게 감사와 고마움을 표하면서 참았던 눈물을 흘린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정윤지는 “내가 그동안 했던 마음 고생은 당사자이니까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면서 “하지만 묵묵하게 뒷바라지와 응원을 해주신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이 감내한 고통의 시간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했다.

그는 이어 “5월에 어버이날과 엄마 생신, 부모님 결혼기념일이 있었다”라며 “비로소 우승이라는 선물로 보답할 수 있게 돼 정말 기쁘다. 가족들에게 내 마음을 담은 선물을 하나씩 해줄 생각이다”는 뜻을 밝혔다.

우승이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칫 패배주의에 빠질 뻔했던 정윤지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작년에 주흥철(43) 코치를 만나면서 부터다. 주흥철은 KPGA투어서 3승을 거둔 뒤 현재는 현역에서 물러나 쇼트 게임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특히 이번 대회에서는 최대 약점으로 지적됐던 퍼팅 능력이 몰라볼 정도로 좋아졌다. 정윤지는 데뷔 이후 18홀 평균 퍼트수가 30개 이하를 찍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대회 전까지 그의 평균 퍼팅수는 31.91개로 전체 102위였다. 그런 퍼팅 실력으로 우승을 바라는 건 헛된 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번 대회서 적어도 퍼팅만큼은 예전의 정윤지가 아니었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출전 선수 가운데 6번째로 퍼팅을 잘했다. 그린 적중 시 평균 퍼트 개수는 1.61개로 출전 선수 평균 1.82개보다 훨씬 적었다.

스스로도 놀랄 변화였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퍼팅 그립을 왼손이 아래에 놓이게 하는 역그립으로 바꾸면서부터다. 주흥철 코치의 제안에 따라 직전 대회인 E1 채리티 오픈부터 바꾼 퍼팅 그립이 제대로 효과를 본 것이다.

정윤지는 “원래는 연습 때 샷에 큰 비중을 두는 편이다. 애초에는 샷과 퍼트를 50대50으로 생각하고 연습하지만 하다보면 샷은 80, 퍼트는 20으로 하게 됐다”라며 “그러다 보니 쇼트 게임, 퍼트 연습에 미흡했다. 올해 3월부터 심각성을 느껴 지금은 50대50 비중으로 연습하고 있다. 이번 우승은 그런 연습 효과인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했다.
지난 1일 경기도 양평군 더스타휴 골프앤리조트에서 막을 내린 KLPGA투어 sh수협은행 MBN 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정윤지가 부모님과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고 승리를 만끽하고 있다. KLPGA

역그립은 머리가 많이 움직이는 잘못된 습성을 바로 잡기 위한 고육지책에서 나왔다.

그는 “퍼트를 할 때 머리가 움직여 헤드가 열리거나 닫혀 미스가 많았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는 연습을 했다”면서 “지난 제13회 E1 채리티 오픈 때부터 크로스핸드 그립으로 바꿨다. 정렬도 원래의 그립보다 잘 나오고 이전에 퍼트를 손으로 치려고 했던 게 부드럽게 리드해주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그립을 바꾼 지 2주 만에 좋은 결과가 있어 기쁘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정윤지는 2022년에 데뷔 첫 승을 거둔 이후 우승이 매년 목표가 됐다. 우승을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그 마음은 더 간절했다. 하지만 그게 외려 자신의 발목을 붙든다는 걸 최근에 깨달으면서 생각을 바꿨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꾸준히 상위권에 드는 게 목표가 됐다”라며 “또 우승하면 물론 좋겠지만, 첫 우승 이후 스스로를 너무 괴롭혔던 거 같아 마음을 내려 놓으려 애쓰고 있다. 앞으로는 스스로를 그만 괴롭히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골프와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그는 팬들에 대한 고마움도 빼놓지 않았다. 정윤지는 “많은 응원을 받는데 우승을 못해 그동안 죄송한 마음이 컸다”라며 “성격이 내향적이라 표현이 서툴다. 대회장까지 찾아 와서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팬들의 성원에 더 유쾌한 모습으로 화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정대균 골프선임기자 golf56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