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고자 다룬 고선웅의 창작신작 ‘유령’

입력 2025-05-23 05:00 수정 2025-05-23 15:25
서울시극단의 ‘유령’에 출연하는 배우 강신구(왼쪽부터)와 이지하 그리고 극작가 겸 연출가 연출 고선웅. 이번 작품은 고선웅이 14년 만에 선보이는 순수 창작극이다. 세종문화회관

“7년 전 무연고자를 다룬 신문 르포기사를 우연히 읽었습니다. 기사를 읽고 가슴이 아파서 언젠가 연극으로 다루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오는 30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개막하는 서울시극단의 ‘유령’은 스타 연출가 겸 극작가 고선웅 단장이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던 무연고자를 소재로 쓴 작품이다. 22일 세종문화회관 서울시극단 연습실에서 만난 고 단장은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주민등록증이나 호적이 없으면 세상에서 잊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뿌리 없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창작 동기를 설명했다.

‘유령’의 시놉시스를 보면 극장에 모인 배우들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으로 연극이 시작된다. 극 중 남편의 지속적인 폭력에 시달리다 도망친 배명순은 정순임이란 이름으로 새 삶을 시작한다. 찜질방과 식당을 떠돌던 배명순은 결국 병을 얻고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한다. 죽음 이후 배명순은 유령이 되어 무대로 다시 돌아온다. 자신처럼 지워지고 잊힌 이들과 함께. 무연고자들의 삶은 극 중에서 유령으로 표현된다. 사라지고 싶어도 사라질 수 없는 존재들이다.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 세종문화회관

고 단장은 “연극을 (소재로) 다루는 연극을 싫어하는데, 이번 작품은 그렇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극중극으로 규정짓기엔 배우들이 연극 속 배역대로 연기하다나가어느 순간 배우 자신이 되어 극 바깥에서 이야기하는 등 현실과 연극의 경계를 계속 넘나든다”면서 “세상은 무대고 인간은 배우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이 이번 작품을 이해하는 열쇳말이다. 우리가 어떤 역할을 맡고 이 세상에 왔다고 할 때 그걸 어떻게 살아내는지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푸르른 날에’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등 고 단장의 기존 작품에서 보이듯 웃음을 잃지 않는다. 고 단장은 “무연고자에 대한 이야기라도 소동극처럼 무겁지 않게 풀었다. 관객에게 힘든 상황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면서 “삶과 인생,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재미를 주고 싶다”고 설명했다.

이번 작품은 고 단장이 지난 2011년 경기도극단에서 ‘늙어가는 기술’ 이후 14년 만에 발표하는 순수 창작극이다. 각종 연극상을 휩쓴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나 최근 백상예술상을 받은 ‘퉁소소리’ 등 한동안 그가 쓰고 연출한 작품은 하나같이 원작이 있었다. 재창작에 가깝긴 하지만 원작이 있다는 점에서 각색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시극단의 ‘유령’에 출연하는 배우 강신구(왼쪽부터)와 이지하 그리고 극작가 겸 연출가 연출 고선웅. 이번 작품은 고선웅이 14년 만에 선보이는 순수 창작극이다. 세종문화회관

그는 “창작은 과정도 지난하고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한 성공을 담보하기 어려워 위험성도 크다”며 “각색을 먼저 해서 글쓰기를 단단하게 하고, 그 뒤에 자연스럽게 생각을 정리하고 세상에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창작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이어 “이 작품에는 개인적인 공명심이 전혀 없고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 같은 게 있었다. 어느 정도의 산고(産苦)는 있었지만, 연습을 시작하고 배우들과 함께 개선해나가며 방향이 잡혔다”고 덧붙였다.

이 작품에는 이지하, 신현종, 강신구, 김신기, 전유경, 홍의준, 이승우 등이 출연한다. 배명순 역의 이지하는 ‘오징어게임’ ‘슬기로운 의사생활’ ‘럭키, 아파트’ 등 영화와 드라마에서 조연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다 6년 만에 무대에 선다. 이지하는 "오랜만에 고 단장님이 출연을 의뢰해서 대본도 읽기 전에 ‘나를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면서 “누군가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냈다는 게 우리 작품 속 유령과 닮았다”고 말했다.

배명순을 때리는 남편 역할의 서울시극단 단원 강신구는 “이번 작품은 연기하는 나도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새로운 형식의 연극이다. 연극을 하다 보면 연기자가 내가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인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번 작품은 내가 누구인지를 자꾸 묻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