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무연고자를 다룬 신문 르포기사를 우연히 읽었습니다. 기사를 읽고 가슴이 아파서 언젠가 연극으로 다루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오는 30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개막하는 서울시극단의 ‘유령’은 스타 연출가 겸 극작가 고선웅 단장이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던 무연고자를 소재로 쓴 작품이다. 22일 세종문화회관 서울시극단 연습실에서 만난 고 단장은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주민등록증이나 호적이 없으면 세상에서 잊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뿌리 없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창작 동기를 설명했다.
‘유령’의 시놉시스를 보면 극장에 모인 배우들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으로 연극이 시작된다. 극 중 남편의 지속적인 폭력에 시달리다 도망친 배명순은 정순임이란 이름으로 새 삶을 시작한다. 찜질방과 식당을 떠돌던 배명순은 결국 병을 얻고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한다. 죽음 이후 배명순은 유령이 되어 무대로 다시 돌아온다. 자신처럼 지워지고 잊힌 이들과 함께. 무연고자들의 삶은 극 중에서 유령으로 표현된다. 사라지고 싶어도 사라질 수 없는 존재들이다.
고 단장은 “연극을 (소재로) 다루는 연극을 싫어하는데, 이번 작품은 그렇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극중극으로 규정짓기엔 배우들이 연극 속 배역대로 연기하다나가어느 순간 배우 자신이 되어 극 바깥에서 이야기하는 등 현실과 연극의 경계를 계속 넘나든다”면서 “세상은 무대고 인간은 배우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이 이번 작품을 이해하는 열쇳말이다. 우리가 어떤 역할을 맡고 이 세상에 왔다고 할 때 그걸 어떻게 살아내는지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푸르른 날에’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등 고 단장의 기존 작품에서 보이듯 웃음을 잃지 않는다. 고 단장은 “무연고자에 대한 이야기라도 소동극처럼 무겁지 않게 풀었다. 관객에게 힘든 상황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면서 “삶과 인생,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재미를 주고 싶다”고 설명했다.
이번 작품은 고 단장이 지난 2011년 경기도극단에서 ‘늙어가는 기술’ 이후 14년 만에 발표하는 순수 창작극이다. 각종 연극상을 휩쓴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나 최근 백상예술상을 받은 ‘퉁소소리’ 등 한동안 그가 쓰고 연출한 작품은 하나같이 원작이 있었다. 재창작에 가깝긴 하지만 원작이 있다는 점에서 각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창작은 과정도 지난하고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한 성공을 담보하기 어려워 위험성도 크다”며 “각색을 먼저 해서 글쓰기를 단단하게 하고, 그 뒤에 자연스럽게 생각을 정리하고 세상에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창작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이어 “이 작품에는 개인적인 공명심이 전혀 없고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 같은 게 있었다. 어느 정도의 산고(産苦)는 있었지만, 연습을 시작하고 배우들과 함께 개선해나가며 방향이 잡혔다”고 덧붙였다.
이 작품에는 이지하, 신현종, 강신구, 김신기, 전유경, 홍의준, 이승우 등이 출연한다. 배명순 역의 이지하는 ‘오징어게임’ ‘슬기로운 의사생활’ ‘럭키, 아파트’ 등 영화와 드라마에서 조연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다 6년 만에 무대에 선다. 이지하는 "오랜만에 고 단장님이 출연을 의뢰해서 대본도 읽기 전에 ‘나를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면서 “누군가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냈다는 게 우리 작품 속 유령과 닮았다”고 말했다.
배명순을 때리는 남편 역할의 서울시극단 단원 강신구는 “이번 작품은 연기하는 나도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새로운 형식의 연극이다. 연극을 하다 보면 연기자가 내가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인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번 작품은 내가 누구인지를 자꾸 묻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