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쵸비’ 정지훈과 ‘페이커’ 이상혁이 붙을 때면, 이토록 수준 높은 게임을 정규 시즌에도 볼 수 있음에 감사하다. 지난 18일 젠지와 T1의 2025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 정규 시즌 두 번째 맞대결에서도 늘 그렇듯 두 미드라이너의 심리전이 치열했다. 젠지 ‘쵸비’ 정지훈은 아지르를, T1 ‘페이커’ 이상혁은 아리를 선택해서 37분 동안 신들린 듯한 칼춤을 췄다.
6분경 미드 갱킹 상황에서 나온 두 선수의 심리전 또한 눈이 즐거웠던 장면. 먼저 이상혁이 궁극기 혼령 질주를 써서 정지훈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러자 정지훈은 일어나라(W)와 신기루(E)→사막의 맹습(Q)으로 도주하려 했다. 하지만 이를 예측했던 이상혁은 점멸로 정지훈의 도주 경로를 막아 신기루 이동을 끊었다.
신기루 이동이 막히자 곧 ‘오너’ 문현준(신 짜오)도 미드에 합류해 정지훈에게 붙었다. 퍼스트 블러드 발생 직전까지 온 상황, 앞선 4분 갱킹에선 점멸을 써서 간신히 매혹을 피했던 정지훈이 이번엔 매혹 심리전에서 이겼다. 그는 상대의 스킬을 피한 뒤 궁극기 황제의 진영을 써 생존했다.
이후에도 두 선수의 스킬 맞히기·피하기·몰아넣기·회피하기 심리전은 계속됐다. 이날 유독 상대방의 핵심 스킬을 많이 피한 정지훈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스킬을 피할 수 있게 무빙을 꺾어서 피한 적도 있고 운이 좋아서 피한 장면도 있다. 그게 겹친 것 같다.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운이 좋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무빙을 꺾어서 피한” 장면은 아마 24분경 나온 드래곤 교전 아니었을까. 이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두 선수 간 심리전의 영역이었다. 우선 정지훈은 바텀 1차 포탑에 박힌 웨이브를 정리하기 위해 바텀에 모습을 보였다. 이를 통해 T1과 이상혁은 정지훈이 드래곤 둥지 뒤쪽을 통해 젠지 본대에 합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드래곤 둥지 인근은 T1이 시야를 장악해둔 상황. 이상혁은 예언자의 렌즈를 써서 둥지에 상대 와드가 없다는 사실과, 정지훈의 실루엣을 확인했다. 그는 정지훈이 위로 움직이고 있다고 판단해 혼령 질주→매혹 콤보를 썼지만, 정지훈은 갑작스럽게 아래쪽으로 무빙을 꺾어 이상혁의 스킬을 피했다.
드래곤 둥지 안에 젠지의 시야가 없었는데 정지훈은 어떻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온 상대방의 스킬 콤보를 피했을까? 리플레이 영상을 통해 중계 화면에는 잡히지 않았던 그의 몇 초 전 움직임을 보면 조금이나마 두 선수의 심리전을 체험해볼 수 있다.
정지훈은 T1 병력이 바텀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으며 둥지를 넘어와 자신에게 위협적인 스킬 연계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둥지 아래쪽부터 페이크 무빙을 시도했다. 한 번 위아래로 빠르게 몸을 흔든 뒤 다시 위로 이동, 다시 위아래로 페이크 무빙…두 번째 무빙에서 상대와 마주했다.
한편 정지훈은 이날 아지르로 착취의 손아귀 룬을 선택하고, 리안드리의 고통→라일라이의 수정홀→균열 생성기→존야의 모래시계를 순서대로 사는 독특한 아이템 트리를 선택했다. 딜링에 치중하기보다는 딜링과 탱킹의 밸런스를 맞춘 셈.
그는 “조합을 보고서 치명적 속도와 내셔의 이빨 빌드를 할까 고민도 했지만, 오늘 빌드가 연습 과정에서 결과가 좋았기에 그대로 진행했다. 이 빌드의 장점은 플레이어의 기량에 따라 아지르가 가장 앞에서 상대의 스킬 사용을 유도하고 상대를 밀어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고점이 높은 빌드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