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다 가블러로 13년 만에 돌아온 이혜영 “무대에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요”

입력 2025-05-20 05:00
13년 만에 국립극단의 ‘헤다 가블러’에 돌아온 배우 이혜영. (c)국립극단

지난 2012년 국립극단과 통합되기 전 명동예술극장이 선보인 헨리크 입센의 ‘헤다 가블러’는 그해 최고의 화제작이었다. 국내 초연 무대인 데다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 이혜영이 12년 만에 연극으로 돌아와 타이틀롤을 맡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억압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여주인공 헤다 가블러는 여배우들에게 ‘여성 햄릿’으로 통한다. 당시 흥행과 비평 모두 거머쥔 ‘헤다 가블러’는 이혜영에게 제5회 대한민국연극대상 여자 연기상과 제49회 동아연극상 여자 연기상을 안겼다.

국립극단이 지난 16일 이혜영을 내세워 ‘헤다 가블러’를 13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렸다. 연출은 2012년과 마찬가지로 박정희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맡았다. 이혜영은 19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박정희 감독님이 초연 때 부족했던 부분을 이번에 완성하자며 출연을 제안하셨다. 13년 전 공연의 재연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프로덕션이라서 좋았다”고 밝혔다. 이어 “초연 당시 캐스팅 제안을 받고 어린 시절 나를 배우로 처음 데뷔시키셨던 극단 현대극장의 고 김의경 선생님을 찾아뵀었다. 그때 ‘헤다 가블러’처럼 세련되고 충격적인 작품을 대학극이 아닌 기성 극단에서 왜 여태까지 안 했느냐고 물었더니 김 선생님이 ‘이혜영 같은 배우가 없었기 때문이지’라고 말씀하셨다”면서 “당시 그 말을 믿고서, 나니까 이 작품을 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공연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고 더 열심히 준비했다”고 웃었다.

배우 이혜영이 19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연출가 박정희 국립극단 예술감독과 함께 ‘헤다 가블러’ 기자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c)국립극단

이번 공연은 국립극단이 관객들의 재연 요청이 지속된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리는 ‘픽(Pick) 시리즈’로 선보인 것이다. 다만 원작의 배경인 19세기 말 분위기의 2012년 초연과 비교해 작품 해석이 달라지면서 무대 세트와 의상 등 거의 모든 것이 현대적으로 바뀌었다. 초연에선 헤다 가블러를 ‘신이 되려 한 여자’로 해석해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로 묘사했다면, 이번엔 젠더와 상관없이 인간이 갖는 욕망과 자유의지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헤다 가블러가 매우 인간적으로 그렸다. 이날 기자간담회에 동석한 박정희 연출가는 “자유와 신세계를 꿈꾸는 젊은 청년들에게 맞는 시대가 언제일지 고민하다가 이번에는 히피즘이 성행했던 1970년대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극 중 헤다 가블러는 신혼여행을 막 마치고 온 새 신부다. 62세의 이혜영이 연기하면서 부담은 없었을까. 그는 “카메라에 담기는 배우의 모습은 나이를 먹은 대로 나온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는 나이가 문제 되지 않는다. 나 스스로 헤다라고 생각하며 연기했다”면서 “연극이 좋은 것은 라이브라 일회성 예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다른 공연을 새 관객과 만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이 때문에 걱정한 것은 체력이 떨어지는 문제였다. 마침 영화 ‘파과’ 홍보와 연극 연습이 겹쳤는데, 링거를 맞는 등 체력 관리에 더욱 신경 썼다. 그리고 출연진 가운데 가장 선배이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헤다로서 신뢰를 주려고 했다”고 피력했다.

배우 이혜영이 출연 중인 국립극단의 ‘헤다 가블러’ 공연 장면. (c)국립극단

이혜영을 비롯해 국립극단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이번 ‘헤다 가블러’는 개막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주요 출연진 중 한 명으로 헤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브라크 역의 윤상화가 개막 전날인 7일 위급한 건강 이상으로 응급 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공연 취소와 연기를 두고 고민하던 국립극단은 개막을 16일로 미룬 뒤 시즌 단원 홍선우를 긴급 투입했다. 홍선우는 이틀 만에 대사를 외우며 브라크 역에 마치 처음부터 캐스팅된 것처럼 무리 없이 소화했다.

이혜영은 “개막 전날 윤상화 배우의 소식에 우리 모두 절망했다. 너무 충격이 커서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들 같았다. 하지만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바로 새로운 배우를 찾아 연습해야만 했던 지난 일주일이 고통스러웠다”고 눈물을 흘렸다. 이어 “드라마나 영화는 쪽대본을 외워서 촬영할 수 있지만, 연극은 전체 대본을 외워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출연진이 여러 차례 호흡을 맞춰야 무대에서 잘 할 수 있다. 홍선우가 새로 투입되면서 다들 준비하느라 고생했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받은 영감으로 본공연에 임하고 있다. 이렇게 공연을 하는 게 기적이란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배우 이혜영이 출연 중인 국립극단의 ‘헤다 가블러’ 공연 장면. (c)국립극단

한편 공교롭게도 이번 공연은 LG아트센터 서울이 이영애를 앞세워 제작한 ‘헤다 가블러’와 비슷한 시기에 올라가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이혜영은 두 배우의 연기 대결이라는 시선에 대해 “배우가 다르고 프로덕션 전체가 다르기 때문에 비교는 불가한 것 같다”고 선을 그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