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스러운 시기에 초한지를 다시 읽어봤다. 초한지는 초의 항우와 한의 유방이 중원의 패권을 두고 맞붙어 열세에 있던 유방이 극적으로 승리한 이야기다. 널리 알려진 역사인지라 정치권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정치나 인생의 교훈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사실 항우는 무예나 출신 가문, 군사의 세력면에서 모두 유방을 압도했다. 특히 항우의 군사가 40만명이었음에 비해 유방의 군사는 많았을 때도 10만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항우가 패배하고 유방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던 이유는 뛰어난 참모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에 있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항우에게는 불세출의 참모 범증이 있었고, 유방에게는 장자방으로 불리는 장량이 있었다. 유방은 장량의 조언을 따랐다. 그러나 항우는 중요한 장면에서 따르지 않았다. 그 장면으로 들어가 보자.
범증은 항우가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방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서안 부근 홍문으로 유방을 초대했다. 100명의 기병만 이끌고 홍문에 온 유방은 곧 함정에 빠졌음을 알고, 빠져나가기 위해 장량의 계책에 따라 항우의 숙부 항백을 끌어들여 우군으로 삼았다.
범증은 항우에게 유방 제거를 독촉했으나, 항우는 이런저런 눈치를 보느라 유방을 제거하지 못했다. 이에 범증이 항우의 사촌 동생 항장에게 검무를 추다가 유방의 목을 베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항백의 방해로 실패하고, 유방이 유유히 도주하자, 범증이 말한다. “오호라! 어린아이와는 일을 도모할 수 없구나. 항왕(항우)의 천하를 빼앗을 자는 반드시 패공(유방)일 것이다. 우리 족속은 지금부터 패공의 포로가 될 것이다.”라고.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항우가 범증의 계책에 따라 홍문에서 유방을 제거했다면 천하가 항우에게 떨어지지 않았을까. 항우는 뛰어난 참모의 조언에 귀 기울이지 않아서 결국 패망했다. 천하를 차지한 후 유방은 자신이 천하를 차지하고 항우가 천하를 잃은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장량, 소하, 한신처럼 나보다 나은 참모들이 있었지만, 항우는 범증 한 명도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우리 현대사에서 범증이나 장량처럼 뛰어난 조력자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전임 대통령 대부분이 불행한 결말을 맞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범증이나 장량처럼 뛰어난 조력자가 있었음에도 전임 대통령들이 의도적으로 배척했는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은 ‘나를 따르라’류의 리더였기 때문에 ‘아니되옵니다’라고 직언할 수 있는 조력자보다는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라며 무조건 따르는 조력자를 선호했기 때문이리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간신(奸臣)을 곁에 둔 리더가 성공한 사례는 없다.
또 한 명의 ‘나를 따르라’류의 대통령이 강제로 퇴임 당한 후, 다음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있다. 차기 대통령은 부디 항우보다는 유방을 모범으로 삼는 사람이 당선되기를 바란다.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