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속의 ‘쓸모없다’는 표현이 내게 강하게 왔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던 주인공이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살아갔고, 버텨냈다. 촬영할 때도 ‘내가 여기서 살아남으면 쓸모 있는 배우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이혜영은 이렇게 말했다. 구병모 작가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파과’는 60대 여성 킬러 조각(이혜영)과 그녀를 뒤쫓는 수수께끼의 남성 투우(김성철)의 이야기다. 이혜영과 김성철은 이번 영화에서 난이도 높은 액션을 펼쳤다.
이혜영은 “이 작품은 내게 특별하다. 소설에 나온 조각을 과연 내가 연기할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인물의 수수께끼같은 힘에 끌렸다”며 “편하게 배우를 할지 도전을 할지 고민하다가 도전을 선택했다”고 강조했다.
김성철은 “이혜영 선생님은 경외심이 드는 배우여서 함께 작품을 한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게다가 60대 여성 킬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한국 영화에서 새로운 시도”라며 “워낙 몸 쓰는 걸 좋아하고 선생님과 액션 연습도 했지만 촬영장에서 감정이 들어갔을 땐 또 달랐다.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고 말했다.
이혜영은 전설적인 킬러 역을 소화하느라 데뷔 45년 차에 ‘부상 투혼’을 펼쳤다. 그는 “액션 첫 촬영에 부상을 입었다. 구덩이에 파묻히는 장면에서 갈비뼈가 부러졌다”며 “촬영을 쉴 수 없어 부상을 입은 상태로 찍다가 갈비뼈 세 개가 부러지고 무릎, 발목도 다쳤다. 나이가 들어 회복이 더디니 ‘이러다 배우 못하는 거 아닌가’하는 공포도 생겼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어 “목숨 걸고 했는데 영화 평이 안 좋으면 어떡하나 걱정도 했다”며 “꼬박꼬박 쓴 영화일지엔 불만 투성이었다. 매일 다쳤고, 민규동 감독은 이런 저런 주문을 하며 내맘대로 연기하지 못하게 꽁꽁 묶었다”고 뒤늦은 하소연을 했다.
김성철에겐 투우의 심리를 보여주는 세밀한 연기와 액션을 동시에 잘 해내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졌다. 김성철은 “캐릭터를 탄탄하게 쌓아가는 과정이 필요했다”며 “마지막 3분 간 속내를 표현하기 위해 두 시간 동안 관객을 속여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처음 들어보는 어려운 주문도 있었다. 25년 만에 들은 조각의 목소리를 알아챘을 때 눈빛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는데, 감독님께서 ‘눈으로 감정을 20%만 보여주자’고 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실제로도 서른 살 이상 차이가 나는 두 배우는 예상 밖의 관능적인 호흡을 만들어냈다. 이혜영은 “조각이 섹시하다는 말까지 들었다. 성철이가 우리의 관계를 만들었다. 어떻게 그런 배우를 만났는지 모르겠다”며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나이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힘과 김성철이란 배우가 가진 매혹적인 태도가 있다. 다시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을 이번에 발휘한 것”이라고 후배에게 공을 돌렸다.
김성철은 “조각과 투우가 한 화면에 있을 때 두 인물이 품고 있는 미묘한 에너지가 부딪쳤으면 했다. 조각 그 자체인 선생님께 맞춰 연기했을 뿐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이들의 고생은 영화가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받는 성과로 빛났다. 이혜영은 “‘감독님께 불평한 것에 대해 제발 나중에 미안하단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베를린에서 감독님께 미안했다”며 웃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