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를 비롯한 서울 주요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초기 한국 개척선교사들의 선교 전략에 영향을 줬다는 제안이 나왔다. 4일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 정병준 교수)는 지난 3일 비대면 줌(Zoom) 미팅으로 제434회 학술발표회를 열었다고 밝히며 이 같은 내용을 전했다.
옥성득 UCLA 교수는 이날 ‘지도와 사진으로 본 서울의 종교 공간의 변화’를 제목으로 1884년부터 1915년까지 기간을 10년 단위, 세 시기로 구분해 분석했다. 옥 교수가 주목한 부분은 개신교의 확산과 함께 종교 공간의 위치가 어디로 어떻게 변화했는지다. 그가 제시한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경 경로는 제물포를 지나 여의도, 마포, 애오개, 서소문(서대문과 남대문까지), 정동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옥 교수는 “한국에 들어온 초기 개척 선교사들은 종교 공간이 들어설 위치를 직접 그리거나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지리적, 문화적 특징을 파악했다”며 “이를 바탕으로 선교 전략을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옥 교수는 서울 정동이 개신교 선교사들의 첫 거주지가 된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설명했다. 그는 “북한산 주변에 불교와 도교 사찰, 유교 사당이 배치돼 있었다”며 “조선 말기의 다종교 수용으로 여러 종교가 혼재돼 있던 상황에서 서울 정동은 선교사들이 발견한 ‘종교 진공 공간’이었다”고 평가했다.
옥 교수는 윌리엄 B 스크랜턴 선교사와 제임스 게일 선교사 등이 그린 지도를 공개했다. 이 지도를 통해 선교사들이 의료 선교 정책을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옥 교수는 “의사였던 스크랜턴이 그린 서울 3대문 진료소 지도는, 의료 사업을 확장하려던 당시 북감리회의 전략적 계획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옥 교수는 “두 번째 시기인 1894년부터 1905년까지 영국 선교사의 지도가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이 큰 변화”라며 “이 지도에는 공사관과 철도 노선이 강조돼 표기됐다”고 소개했다.
마지막 시기인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일본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종교 사원 증가와 교회의 축소가 지도에 드러난다는 것이 옥 교수의 설명이다. 옥 교수는 “통감부 초기, 서울 중부는 조선 개신교와 일본 개신교 조합교회는 물론 일본 불교 천도교 등 다양한 종교의 각축장이 됐다”며 “서울의 주요한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각 종교의 교세 확장에 영향을 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