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갈등이 격화되는 시대, 성서는 현실에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는 “복음의 본질과 무관한 사안엔 유연하게 대응하되 그것이 침묵과 방조의 핑곗거리가 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차 교수는 3일 열린 한국신약학회(회장 이민규) 봄 정기학술대회에서 바울의 ‘아디아포라(adiaphora)’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 교회의 현실 대응을 비판하며 “하나님 나라의 정치는 배제가 아닌 환대, 우월이 아닌 평등, 분열이 아닌 연합의 질서”라고 강조했다.
차 교수는 이날 로마서 13장을 중심으로 사도 바울의 정치 인식을 해석했다. 바울이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고 한 구절과 관련해 “당시 로마 제국이라는 억압적 정권 아래서도 질서 유지를 위해 신앙인이 취한 실용적 태도”라고 분석하며 이와 관련해 아디아포라 개념을 언급했다. 아디아포라는 구원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안들을 뜻하는 고대 철학 및 신학 용어다. 신앙인이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화하지 않고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차 교수는 “세상의 권력은 결국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는 덧없는 것”이라며 “바울에게 절대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건, 곧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대표되는 ‘그리스도 사건’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같은 시선이 오늘날의 정치 현실에도 적용돼야 한다고 봤다. 특히 지난해 말 불거진 12.3 비상계엄 사태를 언급하며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이 특정 정치 노선을 신앙과 결합해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흐름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정치적 아디아포라를 가장한 침묵과 방조가 교회의 자기 성찰 능력을 마비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바울의 아디아포라 정신은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자유였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명분으로 왜곡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신약성서가 단순한 현실 비판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정치’를 제시하고 있다며 “적대를 환대로, 우월을 평등으로, 배제를 포용으로 바꾸는 원리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식”이라고 제시했다. 이어 “이는 종교적 이상이 아니라 오늘의 사회에서도 실현 가능한 대안”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학술대회는 ‘신약성서의 정치학–정세에 개입하는 성서해석’을 주제로 진행됐다. 학회는 “중립이나 중도라는 이름으로 비판 없이 수용되던 성서 해석의 관성을 성찰하고 신약성서가 오늘의 현실에 어떤 응답을 줄 수 있을지 모색하려 한다”고 주제 선정의 이유를 밝혔다.
한편 이날 총회에서는 명지전문대 교목실장인 이승문 교수가 회원 투표를 통해 차기 회장으로 선출됐다.
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