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에는 가수 활동도 했지만, 시야도 좁고 철도 없었어요. 나이가 들고 아이도 낳으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풍부해졌고, 시나리오도 다시 써보게 됐어요.”
2일 전북 전주시 전주중부비전센터에서 열린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올해의 프로그래머’ 기자회견에서 배우 이정현은 단편 영화를 제작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밝혔다. 그는 전주영화제 올해의 프로그래머로서 자신의 취향을 반영해 고른 작품을 상영하고 관객과 이야기를 나누는 GV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정현은 이번 전주영화제에서 단편 영화 ‘꽃놀이 간다’로 감독 데뷔도 했다.
28분 분량의 ‘꽃놀이 간다’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모녀가 주인공이다. 2022년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벌어진 ‘창신동 모자 사건’이 모티브가 됐다. 이정현은 “당시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이 사건을 영화로 남기길 원했다”고 말했다.
영화 ‘꽃잎’(1996)으로 데뷔한 이정현은 중앙대 연극학부에 재학 중이던 1999년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가수 데뷔와 동시에 ‘와’를 히트시키며 테크노 열풍을 일으켰고, 중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으나 마음 한켠엔 늘 연출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하지만 가수로서 성공하며 오히려 배우로의 복귀는 어려워졌다.
그러다 2010년쯤 우연히 박찬욱 감독을 만나면서 다시 영화계에 발을 들일 기회가 만들어졌다. 박 감독은 이정현에게 “왜 연기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이정현은 작품이 들어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털어놨다. 이에 박 감독은 ‘파란만장’의 주연 배우 자리를 그에게 제안했다.
이정현은 “박 감독님이 ‘꽃잎’을 너무나 좋아한다고 하시더라”며 “개봉 때 제가 미성년자여서 (청소년관람불가인) 이 작품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 했더니 감독님께서 직접 영상을 구워서 CD에 넣어 주셨다. 그리고 ‘꽃잎’을 절대 잊지 말고 앞으로도 배우를 꼭 하라고 하셨다”고 회상했다. ‘파란만장’ 출연을 계기로 이정현은 ‘명량’(2014),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 ‘군함도’(2017) 등에 출연하며 다시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던 20대를 지나 영화계에 복귀하고, 가정을 꾸리고, 이제는 영화감독으로까지 데뷔한 이정현은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그는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때는 가수 활동을 하던 20대 시절이었다. 그땐 어딜 가든 팬들이 따라다녔지만 가장 불행했다. 하루에 11개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노래하는 기계’였다”며 “40대가 되고 영화도 찍으면서 비로소 편안해졌다. 지금은 끈기도 생기고 책임감도 커졌다. 아마 20대의 저였다면 ‘꽃놀이 간다’를 찍다가 도망쳤을 것 같다”고 편안한 얼굴로 웃었다.
이정현은 프로그래머로서 선정한 ‘복수는 나의 것’(2002), ‘아무도 모른다’(2005), ‘더 차일드’(2006)와 자신의 출연작 ‘꽃잎’, ‘파란만장’, 그리고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관객들과 함께 공유하며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전주=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