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잠수사 조명한 ‘바다호랑이’…“돈 대신 관객 상상으로 공간 메워”

입력 2025-05-03 15:00
영화 '바다호랑이' 스틸컷. 영화로운형제 제공

예고 없이 벌어진 참사는 많은 이의 가슴에 상처를 남긴다. 11년 전 바다 위에서 벌어진 세월호 참사도 그랬다. 추모만 하기에도 벅찬 일임에도, 진실 규명 과정에서 벌어진 책임 회피와 외면, 갖은 다툼은 없었어야 할 희생과 상처까지 만들고 말았다.

다음 달 25일 개봉하는 정윤철 감독의 영화 ‘바다호랑이’는 세월호 피해자 구조에 나섰던 잠수사들의 이야기다. 그간 많은 영화가 세월호 피해자 및 유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것과는 다른 시선이다. 김탁환 작가의 소설 ‘거짓말이다’를 원작으로 각색한 ‘바다호랑이’는 참사에 주목하는 시선뿐 아니라 이를 영화로 옮기는 방식도 새롭게 시도했다.

영화 '바다호랑이' 포스터. 영화로운형제 제공

‘바다호랑이’는 민간 잠수사 대표 류창대(손성호)가 동료 잠수사의 사망에 대한 과실치사죄로 법정에 서면서, 그의 무죄를 증명하고자 민간 잠수사 나경수(이지훈)가 증인으로 나서며 벌어지는 일을 담았다. 총 3억원 정도의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일반적인 극영화와 달리 연극 같은 형식으로 제작됐다. 모든 장면은 실내 연기 연습실에서 촬영됐고, 바닷속에 잠수하는 장면은 배우의 마임과 푸른 조명 등을 활용해 관객이 빈틈을 상상으로 채우게끔 했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부문에 선정돼 전북 전주를 찾은 정 감독을 지난 1일 만났다. 그는 영화 ‘말아톤’, ‘좋지 아니한가’ 등을 연출했다. 이날 전주영화제에서 처음 ‘바다호랑이’를 상영한 후 관객들과 만나고 온 정 감독은 “새로운 형식의 영화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기대가 많이 됐다”며 “현재까지는 시사 후 반응이 ‘형식이 독특해도 볼만하다’ ‘이렇게도 영화가 되는구나’ 하는 느낌”이라고 만족스러워했다.

정윤철 감독. 영화로운형제 제공

‘바다호랑이’는 공우영, 고(故) 김관홍 민간 잠수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의 제목인 바다호랑이는 김 잠수사의 생전 별명이다. 실화를 스크린에 옮겨 담으며 이처럼 독특한 방식을 시도한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정 감독은 “외부에서 투자를 받았다면 100억원 정도 들어갈 영화였다. 하지만 (기획 당시가) 코로나 기간이기도 했고, 소재도 세월호 참사라 그런지 투자 유치가 쉽지 않았다”며 “그래서 방법을 창의적으로 시도해 돈에서 자유롭게 찍어보기로 했다. 배우의 연기를 최대한 돋보이게 하고, 사운드 효과를 실제처럼 만들어내 관객이 그 공간에 있다고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영화는 나경수를 연기한 배우 이지훈이 카메라 앞에서 눈을 감으며 시작한다. 배우가 눈을 감고 상황에 몰입함과 동시에 관객 역시 이야기 속 공간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경수가 사고 당시 피해자들을 구조하는 장면은 선체 내부가 그려질 것이란 예상과 달리 경수의 얼굴과 몸짓만 카메라에 담긴다. 정 감독은 “아직 발생한 지 10년밖에 지나지 않은 참사라 구조 장면을 정밀하게 묘사하기보다 추상화처럼 보여주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참혹한 장면보다 감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바다호랑이' 스틸컷. 영화로운형제 제공

‘바다호랑이’가 관객과 만나기까지는 시나리오 기획 단계로부터 8년이 걸렸다. 2017년 시작한 시나리오 작업은 2021년에서야 마무리됐고, 투자 등의 문제로 2023년이 돼서야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럼에도 제작을 포기하지 않은 건 ‘해야 할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정 감독은 “민간 잠수사들은 남을 돕기 위해 나섰다가 오히려 범법자로 몰려 재판에 섰다. 그 현실이 어이없고 황당해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타인을 돕는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상처와 트라우마도 조명하고 싶었다”고 했다.

정 감독은 ‘바다호랑이’의 새로운 시도가 침체에 빠진 한국 영화계에 대안과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강조했다. 한국 영화계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겪은 흥행 부진, 투자 위축, 제작 감소의 악순환 속에서 좀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영화 '바다호랑이' 예고편. 영화로운형제 제공

정 감독은 “평생 몇천 편의 영화를 봤지만 이런 형식은 처음이다. 이런 영화도 관객들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고, 개척자가 됐다는 생각에 기분도 좋았다”며 “돈이 적게 드는 만큼 창작자의 의도를 잘 살릴 수 있고, 무엇보다 영화를 찍고 세상에 내보내는 게 가능하다. 돈이 없어도 배우의 연기만 잘 끌어낸다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용기를 한국의 연출자들에게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미소 지었다.

“함께 실험에 나서준 배우들에게 개런티를 더 주지 못한 건 미안하지만, 형식적인 면에서는 부족하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무대와 공간을 비우고 그 틈을 관객이 상상을 통해 스스로 메꾸도록 했더니, 관객의 머릿속엔 100억짜리 못지않은 바닷물과 세트가 채워지는 것 같아요. 물 한 방울 없이 잠수 장면도 찍었으니 이런 방식으로 외계인 침공 영화도, 사극도 다 찍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전주=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