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영화도, 틀 영화도 없다. 2025년 한국 영화의 위기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한 해에도 몇 편씩 ‘1000만 영화’를 내던 한국 영화 산업은 팬데믹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의 등장으로 하락세를 탔고, 극장 관객 수가 감소하면서 ‘돈줄’이 마른 한국 영화의 제작 편수는 크게 줄었다.
3일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순제작비 30억원 이상의 한국 상업영화는 팬데믹 이전인 2019년 45편이 개봉했으나 이듬해 25편, 2021년 17편으로 50% 이상 감소했다. 신작 부진의 여파는 해외 수출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한국영화 완성작 수출금액은 4193만여 달러(약 597억원)로 전년 대비 30% 이상 감소했다.
팬데믹 이전 촬영돼 뒤늦게 개봉한 소위 ‘창고 영화’들이 풀리면서 2022년부터 개봉작 수는 점차 증가했지만 관객 수는 팬데믹 이전에 한참 못 미쳤다. 지난해 한국영화 관객 수는 7147만명으로, 2019년 1억1562만명에 비하면 60% 정도로 집계됐다.
반면 팬데믹을 지나면서 제작비는 뛰었다. 지난해의 경우 순제작비 30억 이상으로 제작·개봉한 상업영화 37편의 편당 평균 총제작비는 115억원이 넘었다. 2019년 순제작비 30억 원 이상 상업영화 45편의 평균 총제작비는 100억원 수준이었다. 관객 수는 감소하고 제작비는 증가하는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당장 올해와 내년 개봉하는 작품 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 매년 40편 안팎의 영화를 공급하던 CJ ENM과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NEW,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등의 올해 개봉작은 다 합쳐도 20편이 채 안 되는 수준이다. 대표적인 영화 제작·투자·배급사인 CJ ENM이 올해 주요 투자자로 참여한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와 이상근 감독의 ‘악마가 이사왔다’ 단 2편이다.
올해까지는 ‘창고 영화’로 힘겹게 버텼다. 문제는 그조차 내년에는 없다는 점이다. 극장업계 한 관계자는 “한국 영화는 이미 보릿고개에 있고, 내년엔 정말 ‘망’(망했다)이라는 얘기가 업계에선 공공연하게 돈다. 1~2년 전에 투자가 됐어야 이제 영화가 개봉하는데 투자작은 매년 줄고 있다”며 “투자가 확정된 내년 개봉작은 투자·배급사마다 한두 편 수준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산업이 반등할 기회가 쉽게 찾아올 거라고 기대하기엔 비관적”이라고 했다.
영화의 양적 위축은 질적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한국 장편 영화는 없다. 칸영화제 공식 부문에 한국 장편이 초청받지 못한 건 2013년 이후 12년 만이고, 공식·비공식 부문을 합치면 26년 만이다.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 최고 작품상인 황금종려상까지 받았던 한국 영화가 국제 경쟁력을 상실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영화계는 올해 연상호 감독의 ‘얼굴’, 김병우 감독의 ‘전지적 독자 시점’, 김미조 감독의 ‘경주기행’ 등의 장편을 출품했지만 초청은 불발됐다. 지난해도 비경쟁 부문인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초청된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 2’가 전부였다. 2022년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이후 3년째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한국 영화를 찾을 수 없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개봉 편수 자체가 줄어들면서 좋은 작품이 나올 확률도 자연스레 줄었다. 최근 정부가 독립영화나 영화제 지원을 줄인 것 등 여러 요소가 함께 작용하면서 악재가 계속됐다”면서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작품보다 흥행이 된다 싶은 장르·소재에 제작이 몰린 점, 소수의 유명 감독에만 기대 온 점도 지금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분석했다.
임세정 정진영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