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지에 잠입해 취재 활동을 펼치된 우크라이나 여성 기자가 시신으로 돌아왔다.
29일(현지시간) 영국 BBC 등은 지난 2월 러시아가 송환한 우크라이나 전사자 시신 757구 속에서 빅토리아 로슈치나(27)의 시신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우크라인스카 프라우다 소속 기자인 로슈치나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건 지난해 10월이었다. 그는 그보다 1년여 전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에 들어갔다가 2023년 8월 실종됐다.
참혹한 시신으로 돌아와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가 송환한 시신 중 마지막 757번째는 유독 작고 가벼웠다. 인식표에는 “이름 미상, 남성, 관상동맥에 심한 손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 인식표에 적힌 글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 시신은 로슈치나의 것으로 확인됐다.
시신의 상태가 나빠서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검시관들은 다리에서 ‘로슈치나’라는 자필 글씨가 새겨진 태그를 발견했다. DNA 검사 결과, 로슈치나의 부모님과 일치했다.
시신은 참혹한 상태였다. 발에는 전기고문의 흔적으로 보이는 화상이 있었다. 엉덩이와 머리에는 찰과상이 남아 있었고, 갈비뼈도 부러졌다. 목뿔뼈(설골)도 부러져 있었는데 이는 목 졸림 피해자에게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뇌와 안구도 빠져 있었다.
우크라이나 검찰은 시신의 상태가 나빠 정확한 사인을 규명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시신의 상태는 그가 가혹한 고문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가디언과 미국 워싱턴포스트, 우크라인스카 프라우다 등은 합동 탐사보도를 통해 로슈치나 기자의 실종과 고문, 사망 과정을 추적해 이날 보도했다.
마지막 여정
로슈치나는 2023년 7월 25일 우크라이나를 마지막으로 떠났다. 폴란드로 가서 리투아니아를 거쳐 라트비아로 이동했고, 거기서 러시아로 입국했다. 이어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 점령지로 들어갔다. 그는 자포리자 원자력발전소 인근 마을에서 숙소를 정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8월 3일을 끝으로 그가 온라인 메시지 계정에 접속하지 않자 아버지가 실종을 알렸다.
우크라인스카 프라우다의 편집장인 세빌 무사이에바는 로슈치나는 점령지에서 러시아 보안요원들이 민간인을 심문하거나 고문하는데 사용하는 건물들을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런 은밀한 시설에서 일하는 러시아연방보안국(FSB) 요원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있었다.
로슈치나는 우크라이나 점령지 안에 들어가 취재하는 거의 유일한 언론인이었다. 그는 2022년 3월에 점령지에 들어갔다고 체포돼 석방되기도 했다. 그러고도 계속 점령지에 잠입했다. 자포리자 원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위험 상황을 폭로했고, 러시아 점령에 반대했던 16세 소년 두 명의 피살 사건을 조사했다.
우크라인스카 프라우다의 편집장은 “로슈치나는 제가 만난 가장 용감한 기자 중 한 명이었다”고 말했다.
실종 후 고문 정황
합동 탐사보도로 실종 후 로슈치나의 모습에 대한 증언도 수집됐다. 러시아 점령지에서 로슈치나와 함께 감금됐다 풀려난 우크라이나 민간인들과 억류자 가족들, 수용시설에서 일했던 직원들, 점령지 내에서 활동하는 법률가 등을 인터뷰했다.
체포된 로슈치나는 러시아 점령지인 멜리토폴로 옮겨져 감금됐다. 수용소 감방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로슈치나는 그곳에서 고문을 당했다. 전기 충격이 사용됐고, 팔과 다리에 칼에 찔린 흉터가 생겼다.
2023년 말, 로슈치나는 혼자 러시아 내 타간로그로 이송됐다. 타간로그 수용소는 러시아가 운영하는 여러 구금 시설 중 최악으로 알려진 곳이다. 우크라이나 정보 당국에 따르면, 타간로그 수용소에서 15명이 사망했다. 고문실이 있고, 배식도 매우 부실했다.
타간로그에서 로슈치나를 만났다는 수감자는 “그녀는 도착 후 미쳐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감방 동료는 “우리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머릿속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보였고, 눈이 겁에 질려 있었다”고 증언했다.
로슈치나의 몸무게는 30㎏으로 떨어졌다. 혼자서 일어설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기아 때문에 발과 다리가 부어올랐다. 심장에도 문제가 생겨 약을 받았지만 먹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병원에 실려가고, 정맥주사를 맞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음식을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2024년 4월 로슈치나의 가족은 러시아 국방부로부터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받았다. 그를 석방시키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고, 바티칸의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나서 러시아에 석방을 요청했다.
8월에 로슈치나는 집으로 전화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부모님에게 “9월에 집에 가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전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식사를 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9월 13일 송환된 49명의 전쟁 포로들 속에 로슈치나는 없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러시아군은 로슈치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9월 19일 사망했다고 알렸다.
러시아가 납치한 민간인 인질들
우크라이나 검찰은 로슈치나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를 찾아내 처벌하기 위한 전쟁범죄 혐의 수사에 착수했다. 우크라이나 외교부는 이날 보도와 관련해 “러시아가 납치한 민간인 인질 문제에 대해 국제사회의 더 큰 관심과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가 납치해 구금한 우크라이나 민간인은 1만6000명으로 추정된다. 구금된 사람들은 구호 활동가들, 기자들, 사업주들, 지역 정치인들, 교회 지도자들, 그리고 침략에 저항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점령지와 러시아 내부의 180개 이상의 시설에 구금돼 있다.
가디언은 “구금된 사람들 대부분이 혐의도 없이 구금되고 있다”며 “이런 식의 구금은 전쟁범죄에 해당할 수 있으며, 기소를 위한 증거가 수집되고 있다”고 전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