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이상은 “올해 데뷔 20주년, 한국 공연 뜻깊어요”

입력 2025-04-28 05:00 수정 2025-04-28 13:40
이상은이 서울시발레단의 요한 잉거 안무 ‘워킹 매드’를 연습하고 있다. (c)세종문화회관

발레리나 이상은(38)은 국내에 있을 때 ‘한국 최장신 발레리나’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발레리나로는 큰 편인 181㎝의 키 때문이다. 선화예고 재학 시절 로잔 콩쿠르 파이널리스트, 국제무용콩쿠르 그랑프리를 받은 이상은은 대학 진학 대신 2005년 유니버설 발레단에 입단했다. 뛰어난 기량을 앞세워 솔리스트로 바로 승급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할 수 있는 작품이 한정적으로 느껴졌다. 긴 팔다리와 섬세한 표현력에도 불구하고 키에 맞는 배역과 파트너를 만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해외 진출을 꿈꾼 그는 오디션을 거쳐 2010년 독일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단에 입단했다. 고전부터 현대까지 발레의 스펙트럼이 넓은 젬퍼오퍼 발레단에서 그는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쳤다. 그리고 2013년 퍼스트 솔리스트(제1 솔리스트)에 이어 2016년 프린시펄(수석무용수)로 승급했다. 그런데, 그가 지난 2023년 영국국립발레단(English National Ballet, ENB) 이적 소식을 알렸다. 젬퍼오퍼 발레단을 이끌던 애런 왓킨이 ENB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며 그에게 이적을 제안한 것이다. ENB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그가 오는 5월 9~18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열리는 서울시발레단의 요한 잉거 안무 ‘워킹 매드 & 블리스’ 공연에 출연한다. 작품 리허설에 한창인 그를 최근 서울 용산구 노들섬에 있는 서울시발레단 연습실에서 만났다.

“요한 잉거의 작품은 여러 차례 춘 경험이 있어요. 이번에 출연하는 ‘워킹 매드’는 2013년 젬퍼오퍼 발레단에서 언더스터디(대역)로 처음 배운 뒤 2016년 주역이 되고서 췄던 작품입니다. 오랜만에 서울시발레단에서 추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또 데뷔 20주년인 올해 한국 관객과 만나는 것도 기쁩니다.”

이상은이 서울시발레단의 요한 잉거 안무 ‘워킹 매드’를 연습하고 있다. (c)세종문화회관

서울시발레단은 지난해 창단 때부터 이상은에게 객원 수석을 제안했다. 이상은이 젬퍼오퍼에서 다양한 컨템포러리 발레 레퍼토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국내 유일 컨템포러리 발레단인 서울시발레단은 이상은의 합류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한편 후배인 시즌 단원들에게 자극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제가 해외 진출을 고려한 이유 가운데 키가 커서 저랑 어울리는 파트너를 찾는 것도 있었지만 컨템포러리 발레를 더 많이 해보고 싶어서였어요. 유니버설 발레단 시절 ‘디스 이즈 모던’ 공연에서 오하드 나하린과 윌리엄 포사이스 같은 안무가의 작품을 춘 뒤 해외에서 이들과 직접 작업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가 희망한 대로 젬퍼오퍼 발레단은 유명한 컨템포러리 발레를 공연할 뿐만 아니라 새롭게 작품을 위촉하는 경우도 많았다. 덕분에 그는 발레계에서 살아있는 거장으로 불리는 안무가들과 여러 차례 작업했다. 그는 “포사이스는 가장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안무가다. 그래서 그동안 국내에서 갈라 초청을 받으면 두 개 중의 하나는 포사이스의 작품을 선보였다. 포사이스의 작품은 어렵지만, 공연을 마치고 나면 성장한 느낌이 든다”고 설명했다. 이어 “포사이스 외에 자주 공연했던 안무가가 데이비드 도슨인데, 2018-2019시즌 젬퍼오퍼 발레단이 그에게 위촉했던 ‘사계’ 초연에 출연했다. 작업 과정에 초연 무용수들의 아이디어가 많이 반영되는 것이나 나중에 다른 발레단에서 공연하면서 무용수에 따라 버전이 조금씩 바뀌는 걸 보는 게 흥미로웠다”고 부연했다.

지난 2019년 한국에서 열린 ‘르 프리미에 갈라’에서 이상은이 윌리엄 포사이스의 ‘바흐 듀엣’을 추고 있다. (c)Baki

컨템포러리 발레는 클래식 발레의 형식주의에 반발해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하는 모던 발레 가운데 당대성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요즘엔 거의 현대무용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파격적인 작품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 클래식 발레가 인기를 구가하는 것과 달리 컨템포러리 발레는 아직 인기가 높지 않다. 그는 “유럽 발레단은 컨템포러리 발레를 하지 않는 곳이 없다. 다만 유럽도 클래식 발레와 비교해 컨템포러리 발레는 인기가 없다. 공연 횟수도 적고 매진도 잘 안 된다. 하지만 새로운 것과 다양성에 대한 추구를 중시하기 때문에 컨템포러리 발레를 관객에게 소개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것 같다 ”면서 “특히 젬퍼오퍼는 드레스덴주를 대표하는 발레단으로서 창작은 일종의 자부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창작에 대한 지원이 많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이적한 ENB는 영국에서 로열 발레단과 함께 손꼽히는 단체다. 젬퍼오퍼 발레단처럼 극장 전속 단체가 아니라 투어링 컴퍼니이기 때문에 공연 횟수도 많은 데다 ‘공연예술의 도시’인 런던의 특성상 주목을 많이 받는다. 다만 발레리나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에 그가 발레단을 옮긴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상은이 서울시발레단의 요한 잉거 안무 ‘워킹 매드’를 연습하고 있다. (c)세종문화회관

그는 “애런 왓킨 감독님은 획일화된 무용수보다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개성적인 무용수를 좋아한다. 그래서 젬퍼오퍼 발레단이 나랑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 감독님이 ENB로 옮기시면서 나를 포함해 4명에게 이적을 제안했는데, 새로운 도전이자 중요한 경험이 되겠다고 생각해 모두 받아들였다”면서 “ENB에 가서 ‘백조의 호수’ 첫날 출연을 맡았다. 새로운 무대에서 새로운 관객을 만나는 것이라 시험을 치르는 것 같았다. 다행히 스태프 등 주변의 도움으로 잘 마쳤다”고 설명했다. 이어 “드레스덴과 비교해 대도시인 런던은 볼 게 많다. 무엇보다 공연, 전시 등을 마음껏 보러 갈 수 있어서 좋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금껏 큰 부상 없이 20년을 무대에 서왔다. 그리고 무용계에서 한국, 독일, 영국의 발레단에서 활동한 특별한 사례가 됐다. 그가 이렇게 롱런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그는 “무용수에게 부상은 심각한 문제인데, 지금까지 다행히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이건 학교에서 기본기를 잘 다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부상을 당하지 않게 근력 강화 운동 등을 꾸준히 하는 게 비결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젊을 때 빨리 활동한 뒤 일찍 무용을 그만두고 30대엔 공부하려고 했다. 그래서 대학에도 가지 않고 유니버설 발레단에 입단했었다. 하지만 삶이 계획대로 가지는 않는 것 같다. 공부만 하더라도 독일에서 발레단 생활을 하며 드레스덴 팔루카 댄스 스쿨에서 무용교육으로 석사 과정도 밟았다. 다만 영국으로 가느라 3년 가운데 마지막 1년을 휴학한 상태”라면서 “열심히 하되 인내심을 가지고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 당장 캐스팅 안됐다고 남들과 비교해 위축될 필요가 없다. 자신만의 속도로 가다 보면 기회가 온다”고 강조했다.

이상은이 서울시발레단의 요한 잉거 안무 ‘워킹 매드’를 연습하고 있다. (c)세종문화회관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