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고, 이를 포기하고 한 진술은 법정에서 유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잘 들으셨죠? 미란다 원칙을 고지해 드린 겁니다. 자, 이제 조사 시작하겠습니다.”
젊은 수사관이 피의자에게 성의껏 미란다 원칙을 설명한다. 사실 경찰 조사에 임하는 피의자는 잔뜩 긴장한 상태여서 수사관이 고지한 미란다 원칙이 어떤 의미인지 헤아릴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행히 젊은 수사관은 친절하게 그 의미를 설명해 준다. 형식적으로 미란다 원칙이 기재된 종이를 건네며 읽어보라고 하면서 대충 설명해 주는 수사관도 많은데, 젊은 수사관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 피의자는 미란다 원칙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한 상태에서 필자가 변호인으로 참여한 상태에서 묵비권을 포기하고 조사에 임한다.
‘미란다 원칙’은 성폭행 피의자였던 ‘미란다’ 사건에서 유래했다. 미란다는 1963년 3월 2일, 18세 여성을 납치해 외딴곳으로 끌고 가 성폭행한 혐의로 체포됐다. 미란다는 체포된 후 수사기관에서 자신의 범죄를 자백했다. 변호인 선임 비용을 마련할 수 없던 미란다에게 국가는 변호인 선임 비용 100달러를 지원해 줬다.
이렇게 우리나라로 따지면 국선변호인이 된 변호사는 미란다 사건의 진행 과정을 살펴보던 중, 경찰이 미란다를 체포하면서 묵비권과 변호인 조력권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법정에서 이 점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이 사건은 결국 미국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갔는데, 연방대법원은 ‘비록 피고인의 자백이 존재하나, 묵비권과 변호인 조력권을 고지하지 않은 채 이뤄진 위법한 체포에 의한 자백이므로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라면서 미란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을 계기로 전 세계에 미란다 원칙이 퍼지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형사소송법에 이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무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다가 1987년 2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게 됐다. 당시 경찰관들은 박종철에게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고 치안본부가 있던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 가 잔혹하게 고문해서 죽이고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고까지 하였다. 이 사건 이후로 미란다 원칙이 엄격하게 적용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그렇다면 미란다 원칙 위반 때문에 무죄를 선고받은 미란다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성폭행을 저지른 자를 절차위반을 이유로 풀어준 판결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미란다는 포커게임을 끝내고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누군가에 의해 무참하게 칼에 찔려 죽었다. 만약 경찰이 미란다에게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고 체포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했다면, 미란다가 살해되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국가가 적법하게 제대로 정의를 실현했다면 사적 정의를 실현하려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평생 처음으로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오던 피의자가 말한다. “억울하게 고소당해서 걱정했는데, 변호사님이 참여해서 함께 조사를 받으니까 안심이 됐어요. 경찰분이 고지해 주신 미란다 원칙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게 된 것 같고요.”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