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매립지 위에 세워진 희망, 그리스 로마족을 변화시킨 한국인 선교사

입력 2025-04-20 07:47 수정 2025-04-20 08:03
그리스 테살로니키 카테리니에 자리잡은 로마족 마을. 멀리 올림포스산이 보인다.

140년 전 외국인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조선 땅을 밟은 것처럼, 이제는 한국인 선교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최근 그 현장 중 하나인 그리스 로마족 마을을 방문했다.

그리스 테살로니키 카테리니에 자리잡은 로마족 마을. 멀리 올림포스산이 보인다.

지난달 중순 그리스 테살로니키 국제공항에서 남동쪽으로 1시간가량 운전해 도착한 곳은 카테리니 마을.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그리스 산맥 최고봉에 있는 올림포스산이 멀리서 희미하게 보였다. 그리스에서 27년간 사역한 김수길(68) 조숙희(65) 선교사 부부와 함께 비탈진 좁은 길을 따라가는 동안 곳곳에서 쓰레기를 태우는 메케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양철로 만든 집들 옆으로는 빨래들이 빨랫줄에 줄지어 널려있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나라의 1960~70년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쓰레기 매립지 위에 세워진 교회

“깔리메라(안녕하세요).” 간신히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에서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로마족으로 불리는 이들이 김 선교사 부부에게 반갑게 그리스어로 인사하며 손을 흔들었다. 5분 뒤 선교사 부부가 섬기는 ‘카테리니 로마교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테리니 로마교회’ 전경

이곳은 한국에서는 ‘집시’로 불리는 로마족들의 마을이다. 로마족은 1000여년 전 인도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종족으로 오랫동안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삶을 살아왔다. 도둑 소매치기 사기꾼 등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리스 내 로마족의 정확한 인구는 파악되지 않았으나 약 50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김 선교사는 “카테리니 마을은 정부가 로마족에게 어쩔 수 없이 떼어준 땅이지만 공식적으로는 불법 지역”이라며 “태우는 냄새가 진동했던 이유는 이 마을의 지하에 쓰레기가 매립돼 있기 때문이죠. 땅을 조금만 파면 쓰레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종족

김 선교사는 1990년 10월 이스라엘에서 공부하던 중 오순절 방학 때 처음 그리스를 방문했다. 당시 소비에트 연방 붕괴와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전쟁으로 테살로니키에 많은 난민이 유입됐다. 역에서 만난 전쟁 난민들이 그의 마음에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재확인해줬다고 한다.

카테리니 마을의 해맑은 아이들

“그때 만난 난민들을 위해 7년 후 파송을 받아 테살로니키에 도착했어요.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보내주신 종족은 바로 로마족이였습니다.” 김 선교사는 만삭의 몸으로 추운 날씨에 길에서 구걸하는 십 대 소녀를 보고 로마족 선교를 시작했다.

길거리 전도에 앞서 성경공부를 하는 모습

현장에서 만난 로마족의 생활

27년이 지난 지금, 카테리니 마을의 교회는 소외된 이들의 지지대가 되어준 신앙 공동체로 성장했다. 이날 늦은 오후 교회에서 리더들을 위한 성경공부가 시작됐다. 한 시간가량 이어진 성경공부를 마친 후 김 선교사 부부와 현지인 리더 8명은 주일을 앞두고 길거리 전도에 나섰다. 마을을 돌며 만나는 주민들에게 인사하면서 찬양을 부르고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었다.

길거리 전도하는 모습

한 중년 남성은 관절염에 시달리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 전도팀은 아픈 이를 둘러싸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치유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주거 환경이 괜찮은 편인 이들은 자신의 집에서 잠시 쉬어가라며 탄산음료를 건넸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방문은 마을 끝자락에 있는 한 가정이었다. 전기 없는 어두컴컴한 집에 가구라고는 침대 하나뿐이었다. 마약에 중독된 가장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딸은 자폐증세로 머리가 헝클어진 채 침대에 겨우 누워있었다. 딸 옆에 있는 엄마는 연신 눈물을 흘렸다. 전도팀원들은 고개를 떨구며 이 가정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 해가 서서히 지는 동안 10여 가정을 2시간 동안 방문한 뒤 이들은 주일 준비를 위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찬양으로 가득한 주일예배

다음 날 주일 오전 10시에 시작된 예배는 1시간가량 찬양으로 이어졌다. 조 선교사와 현지인 세 명으로 구성된 찬양팀의 찬양은 뜨거웠다. ‘예수 우리 왕이여’ ‘내 하나님은 크고 힘 있고 능 있어’ 등의 찬양이 이어졌고, 어린아이들은 모두 앞으로 나와 전심으로 찬양했다.

주일예배 찬양 시간

예상치 못한 순서가 이어졌다. 현지인 리더는 주일예배에 참여한 기자에게 로마족인 다음세대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 “140년 전 복음 들고 이 땅에 온 선교사들로 인해 한국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처럼, 로마족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는 은혜가 더해지길 소망합니다.” 기도를 마치자 로마족 성도들은 “아멘, 아멘”을 연이어 외쳤다.

로마족 다음세대들이 찬양을 하는 모습

이어서 김 선교사는 그리스어로 설교했고 현지인 리더가 로마족 언어로 통역했다. 올림포스산 아래, 쓰레기 매립지 위에 지어진 작은 교회에서 50여명 로마족들과 함께한 주일예배는 특별했다.

도둑질 멈춘 청년, 현지인 리더로

이후 김 선교사 부부는 현지인 리더들과 식사 교제를 했다. 현지인 여성들이 전날부터 부지런히 준비한 자리였다. 30년 가까이 로마족들을 섬기는 데에는 오랜 희생과 인내가 필요했다. 말씀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이들은 점차 김 선교사 부부의 모습처럼 다른 로마족을 위해 섬기는 이들로 성장해있었다.

주일예배 뒤 김수길 선교사 부부가 리더십들과 식사 교제를 하고 있다. 왼쪽이 에반겔리 깔리오라스씨.

이날 찬양팀을 이끌고 설교 통역을 맡았던 에반겔리 깔리오라스(35)씨는 선교사 부부가 27년간의 로마족 사역 중 가장 큰 열매로 꼽은 인물이다. 그는 23세에 예수님을 영접한 뒤 도둑질을 멈추고 변화된 삶을 살고 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부모의 이혼을 겪는 그는 지금 7명의 직원을 둔 인력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그는 “고물만 줍던 인생이었는데 이제는 닭 농장에 필요한 일군을 제공하는 회사를 운영한다”며 선교사 부부에게서 배운 ‘십일조’를 삶의 전환점으로 꼽았다. 오는 9월 에반겔리는 회사 운영을 직원들에게 맡기고 아테네 신학교에 재입학할 예정이다. 이어 “선교사 부부가 저에게 복음을 전해주신 것처럼 동족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테살로니키(그리스)=글·사진 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