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엄마 아빠는 다 차가 있는데 우리는 왜 복지콜만 타?”
중증 시각장애인 한솔(40)씨는 최근 일곱 살 딸아이에게 들었던 이 말이 마음에 깊이 남았다고 했다. “아이가 아직 어려서 상황을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영상으로라도 운전하는 엄마의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는 이날 경험을 통해 딸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있다고 했다. “엄마도 어려운 걸 해냈으니 너도 힘든 일이 있으면 도전해보자. 그게 진짜 용기야.”
한씨는 같은 장애를 지닌 남편 김익환(41)씨와 함께 18일 서울 마포구 서부운전면허시험장에서 열린 ‘시각장애인 운전체험’ 행사에 참여했다.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관장 김미경)은 제45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도로교통공단 서부운전면허시험장과 함께 시각장애인 운전체험 행사를 열었다. 올해로 5년째를 맞은 행사는 현행법상 직접 운전이 불가능한 중증 시각장애인들이 오랜 꿈이던 ‘운전’을 잠시나마 현실로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이날 행사에는 총 6명의 중증 시각장애인이 참여했다. 완전 실명(전맹)으로 혼자 보행이 어려운 참가자도 있었고 근소한 빛만 감지하거나 일부 시야만 남아 있는 저시력자도 있었다. 이들은 먼저 실내에서 운전 시뮬레이터를 체험한 뒤 도로교통공단의 철저한 안전관리 아래 실제 시험용 도로 트랙에서 차량을 운전했다.
처음 시뮬레이터에 앉은 참가자들은 조심스레 핸들을 어루만졌다. 옆에 선 공단 직원이 기어 위치, 액셀과 브레이크, 차량 구조 등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핸들을 살짝만 돌려도 크게 반응하는 차의 움직임에 참가자들은 놀람과 긴장, 그리고 벅찬 감동을 감추지 못했다.
시각장애 1급 저시력을 지닌 서민희(36)씨는 “언젠가 무인차가 나오면 타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만 했을 뿐 운전은 애초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직접 핸들을 잡고 브레이크와 액셀을 밟아 보니 차가 움직이는 게 정말 실감 났고 너무 신기했다”고 말했다.
도로주행시험장소에서 실제 차량에 올라탄 순간에는 참가자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굳은 표정이었지만 두세 바퀴를 돌며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이내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참가자들은 2인 1조로 나뉘어 차량을 번갈아 운전했고 공단 소속 시험관과 보호자가 함께 동승했다. 제한 속도는 시속 30~40㎞였지만 체험 자체가 이들에게는 완벽한 ‘드라이브’였다.
이날 참가자 중 막내였던 김지명(20)씨는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전맹 시각장애인이다. 원래 친구들과 함께 참석하려 했지만 시험 기간이라 혼자 참가했다. 그는 “오늘 직접 해보니 운전은 정말 익스트림 스포츠 같았다”며 “그동안 몇 시간씩 운전해준 부모님이 새삼 존경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스포츠여가지원팀의 신지환(28) 직원은 이 행사를 네 번째로 함께했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운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꿈”이라며 “이 체험은 ‘나도 할 수 있다’는 도전 의식을 심어주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리는 사회로 나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대상 운전체험은 매년 장애인의 날(4월)과 흰 지팡이의 날(10월)에 맞춰 열린다. 체험 대상자는 서울시에 등록된 중증 시각장애인 중 신규 참여자 위주로 6명을 선발한다. 평균 경쟁률은 4대 1이며 지원 시 사연을 제출하면 가산점이 부여된다.
한편,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은 운전체험 외에도 학습권 보장, 여가활동 지원, 직업 활동 및 자립 기반 마련 등 시각장애인을 위한 다양한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다.
글·사진= 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