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제관계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서로 한심하다며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다가도 제자를 위해 죽겠다는 스승, 그리고 수술받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제자라니. 정상의 범주를 넘어선 두 사제가 서로를 향해 보여주는 집착과 애정, 증오의 행동을 보고 있자면 어딘가 묘하면서도 코믹하다. 디즈니플러스 시리즈 ‘하이퍼나이프’ 얘기다. 이 묘한 사제 관계는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한국에서는 공개 직후부터 종영까지 줄곧 1위를 지켰다.
지난 14, 15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설경구와 박은빈을 만났다. 두 사람 역시 ‘하이퍼나이프’를 봤을 때의 첫인상을 ‘묘하다’는 말로 표현했다. 박은빈은 “대본을 보고 ‘뭐지 이 오묘한 대본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감정들이 오가고 평범하지 않은 사제 간이라, 이 드라마는 어떤 메시지를 얘기하고 싶은 걸까 하는, 평소의 제 물음은 이번 작품엔 갖지 않았다”며 “메시지보다는 (시청자들이) 새로운 감각들을 체험해보는 것에 주안점을 뒀다”고 말했다.
‘하이퍼나이프’는 뇌에 미친 두 천재 외과의사 최덕희(설경구)와 정세옥(박은빈)의 치열한 대립을 그린 메디컬 스릴러다. 하지만 이 작품을 스릴러로만 표현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두 사람은 서로가 같은 부류의 인간임을 알아보지만, 그 반가움을 비뚤어지게 표현한다. 늘 투덜거리고 언성 높여 다투는 둘이지만, 그 밑에는 애정이 깔려있다. 특히 덕희가 하는 선택들은 늘 세옥을 위한 것이어서 얼핏 순애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을 시청자들은 ‘피폐 멜로’라 부르기도 한다.
설경구는 “(세옥에 대한 덕희의 감정이) 하나는 아닌 것 같다. 처음엔 애증이라 생각했는데, 나중엔 사랑 같기도 하고, 측은지심도 있고,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한 감정이었다”며 “덕희는 세옥에게 데칼코마니 같은 끌림을 느낀 것 같다. 그래서 이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자 애정에 세옥의 뒤처리도 해준 게 아닐까 싶다”고 했다.
덕희와 세옥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매우 충동적이다.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의사라는 점에서 이 두 사람을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하는 시청자가 많았다. 하지만 설경구와 박은빈은 이들을 사이코패스란 틀에 가두지 않았다고 했다.
박은빈은 “사이코패스로 생각하고 연기하면 이 캐릭터의 진폭을 한정적으로 보게 될까 봐 단정하려 하진 않았다”며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같은 유형을 그러모은 반사회성 인격장애의 특성을 참고해 입체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설경구는 “사이코패스보다는 자기 분야 외에는 모든 게 어설프고 바보 같은, 두 비정상적인 괴물 같았다”며 “둘만의 감정 소통도 있어서 사이코패스는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아역으로 데뷔한 박은빈은 배우 데뷔 30년 만에 처음 악역을 맡아 화제가 됐다. 그간 박은빈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무인도의 디바’ 등에서 보여준 선한 이미지의 인물을 주로 연기해왔다. 박은빈은 “정세옥이 악역이어서 혹은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어서 이 작품을 선택하진 않았다. 대본 첫 장에 ‘의사인 주인공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한다’는 설정이 쓰여 있는 걸 보고 확 흥미가 생겼었다”며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장면과 행동, 감정들이 많았는데, 이 작품으로 해갈된 것 같다. 신선한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이퍼나이프’가 독특한 인물과 이야기를 가진 작품이었던 탓에 설경구와 박은빈은 어떤 때보다도 많은 대화를 나누며 방향을 잡아나갔다. 하지만 유일하게 의견이 갈린 부분이 있었다. 엔딩 장면이다. 수술방에 있는 세옥 앞에 등장하는 의문의 인물을 두 사람은 다르게 해석했다.
설경구는 “그 장면을 제가 찍지 않았다. 저는 제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덕희의 마음으로는 세옥이 실패를 통해 큰 걸 하나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박은빈은 “저는 누구 하나 지지 않은, 서로가 서로의 목표를 이룬 완전한 해피엔딩이라 생각했다. 세옥을 울리고 싶었던 덕희도, 덕희로부터 원치 않는 가르침을 얻지 않고 자기만의 퍼펙트를 찾은 세옥도 목표를 이룬 것”이라고 말했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