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셔먼호에 가려진 그의 진심” 토마스 기념 포럼

입력 2025-04-14 15:51
'토마스 선교사와 한국교회' 포럼 참가자들이 14일 서울 동작구 총신대 주기철기념홀에서 유해석 총신대 선교대학원 교수의 발표를 듣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순교자인가 제국주의 앞잡이인가.

로버트 토마스(1839~1866) 선교사를 둘러싼 평가엔 여전히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평양 대동강으로 입국을 시도한 영국인 선교사다. 제너럴셔먼호가 대포를 쏘며 통상과 교역을 강요하자 1866년 9월 5일 조선 관군은 배에 불을 지르고 선원들을 살해했다. 통역관으로 승선했던 토마스 선교사도 이날 관군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토마스 선교사를 순교자로 인정하지 않는 시각은 대부분 제너럴셔먼호 사건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조선인이 그를 선교사라는 이유로 죽이지 않았고, 제너럴셔먼호가 조선의 주권을 침입했다는 이유로 죽었기 때문에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하지만 제너럴셔먼호 사건만으로 토마스 선교사를 평가하는 건 너무나도 지엽적입니다. 주영포 입항 후 순교하기까지 그가 조선에 체류한 기간은 불과 17일이었습니다.”

발표 중인 유해석 교수. 신석현 포토그래퍼

유해석 총신대 선교대학원 교수는 14일 “토마스 선교사를 순교자로 인정하지 않는 건 그의 생애와 조선 입국 동기를 고려하지 않은 평가”라며 이같이 주장했다. 총신대 선교대학원과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109회 총회 기념사업특별위원회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160주기를 1년 앞두고 서울 동작구 총신대에서 개최한 ‘토마스 선교사와 한국교회’ 기념 포럼에서다.

유 교수는 “토마스 선교사는 의학을 공부하다가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토마스 선교사가 1856년부터 1866년까지 런던선교회에 쓴 21통의 편지와 런던대 뉴 칼리지 이사회의 모든 기록들을 살펴봐도 그가 식민주의를 옹호했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며 토마스 선교사를 순교자로 보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토마스 선교사와 한국교회' 포럼 참가자들이 발표를 듣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① 최치량(1854~1930) 등 토마스 선교사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이 훗날 기독교인이 됐다.
② 존 로스(1841~1915) 선교사의 한국어 성경 번역에 영향을 줬다.
③ 그의 순교 정신이 후대의 선교사들에게 간직돼 내려왔다.
④ 런던선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졌다.
⑤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 이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고, 서구 교회가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날 포럼에선 토마스 선교사 관련 자료 전시회도 진행됐다. 전시물로는 새로 발견된 토마스 선교사의 사진과 그의 가족사진, 토마스 선교사의 조선 전도 여행 지도와 그가 주고받은 편지가 포함됐다.

총신대 선교대학원 제공

총신대 선교대학원 제공

이현성 기자 sag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