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들 왔어요. 아들이 왔어요.”
증손녀를 품에 안은 김광익(78) 씨는 아버지를 부르며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1950년 7월 평소처럼 식사를 하고 집을 나섰던 아버지는 그날 이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김씨는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면 사람들이 아버지가 묻혔다고 알려준 모슬포 섯알오름에 올라 노래를 부르곤 했다.
김씨가 그토록 그리던 아버지를 다시 만난 것은 지난해 여름. 슬퍼하는 아버지 김광익씨를 안타까워하던 아들 김경현씨가 4·3 행방불명희생자 신원 확인을 위한 유가족 채혈을 신청했고, 며칠 뒤 일치하는 유해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섯알오름 어딘가에 묻혀 있을 줄 알았던 김광익씨의 아버지 고(故) 김희숙씨는 제주국제공항 남쪽에 묻혀 있었다.
희생자의 유해가 발굴된 건 지난 2007년, 이후 유가족 채혈이 이뤄지기 전까지 고인은 17년간 홀로 가족을 기다렸다. 29세에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까지 74년이 걸렸다.
제77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이 3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 위령제단·추념광장에서 봉행됐다.
행정안전부가 주최하고 제주도가 주관한 올해 추념식은 ‘4·3의 숨결은 역사로, 평화의 물결은 세계로’를 주제로, 4·3생존희생자와 유족, 정부 주요 인사, 제주도민 등 약 2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행사는 오전 10시 1분간 제주도 전역에 울리는 묵념 사이렌, 인공지능(AI) 기술로 제작된 ‘평화의 종’ 타종으로 시작됐다.
올해 경과보고는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진행됐다. 11세에 4·3을 겪은 4·3문화해설사 홍춘호씨가 학생들과 4·3유적지를 방문해 현장에서 4·3을 설명하고, 미래세대에게 제주4·3을 기억해 널리 알려줄 것을 부탁했다.
유족 사연으로는 지난해 유전자 감식으로 74년 만에 부친을 만난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김광익씨의 3대 이야기가 소개됐다.
가족을 대표해 사연 발표에 나선 손자 김경현씨는 유전자 감식으로 할아버지 고(故) 김희숙씨를 만나게 된 이야기를 전하며 유가족들에게 채혈에 적극 나설 것을 권했다.
김씨는 “유해를 못 찾으면 유가족은 눈을 감아도 제대로 감을 수 없을 것”이라며 “피 검사를 통해 찾아보기라도 해야 원이라도 풀 수 있다”고 말했다.
증손녀 김해나 양은 “한강 작가님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작별할 수 없는 아픔을 얘기했는데, 우리 가족은 이제 오랫동안의 아픔과 작별하고 증조할아버지를 잘 보내드릴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이날 추념식에는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 우원식 국회의장, 강도형 해양수산부 장관, 고기동 행정안전부 차관 등 정부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최형두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 김선민 조국혁신당 대표 권한대행,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 한창민 사회민주당 대표, 용혜인 기본소득당 대표 등 정치권 인사들도 추모의 뜻을 함께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추념사에서 “77년 전 냉전과 분단의 시대적 아픔 속에서 수많은 분들이 무고하게 희생됐다”며 “그러나 제주도민의 끈질긴 노력으로 2000년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22년부터는 희생자에 대한 보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어 “제주4·3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생존희생자와 유가족의 아픔을 위로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본 책무”라면서 “정부는 미진한 부분에 대한 추가 진상조사를 올해 안에 마무리하고, 생존희생자와 유족을 돕기 위한 트라우마 치유센터 건설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상 처음으로 국회를 대표해 추념식을 찾은 우원식 국회의장은 화해와 상생의 4·3 정신을 강조하며 평화를 바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함께해 달라는 뜻을 전했다.
우 의장은 “제주의 무고한 국민들은 헌법이 공표되고 석 달이 채 되지 않을 때 정부가 내린 포고령과 계엄령 하에서 무참히 희생당했다”며 “77년 전 제주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을 함께 생각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4·3의 가해자들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규정해 낙인 찍어 제거하고 배제하고 차별했다. 그 뿌리가 깊고 질기게 남아 오늘 우리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다”며 “이는 12·3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에서 일어난 적대와 선동, 혐오와 폭력도 다르지 않다”고 꼬집었다.
우 의장은 “그러나 제주4·3은 아픈 역사를 숨김없이 드러내 잘못을 밝히고, 해결 과정을 통해 화해해야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며 “불행한 역사가 남긴 상흔을 온전히 치유하는 일에 국회가 제주와 함께 하겠다. 제주의 기억을, 우리의 약속을 모욕하고 폄훼하는 일이 더는 없도록 국회가 제주와 함께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오영훈 제주도지사는 인사말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한다. 육지에서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에 중대한 역할을 해 온 진실화해위가 진실 규명의 중단으로 활동을 종료해서는 안 된다”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을 개정해 반드시 3기 진실화해 위원회가 출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창범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은 “그동안 유족들은 가족이 학살당한 슬픔을 하소연할 곳도 없이 엄혹한 시절을 보냈으나, 유족과 도민의 노력으로 희생자 보상금 지급과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다”며 4·3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성원과 유해 발굴을 위한 법적 토대 마련을 요청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