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국내 초연 이후 11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원스’(~5월 31일까지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는 2007년 개봉한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다. 아일랜드 더블린을 배경으로 거리의 기타리스트 가이(Guy)와 꽃 파는 체코 이민자 걸(Girl)의 만남을 통해 꿈과 사랑을 이야기한다. 2012년 미국 공연계의 권위 있는 토니상 12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작품상 등 8개 부문에서 수상한 수작이다. 그런데, 국내에서 두 번째 시즌인 뮤지컬 ‘원스’가 첫 번째 시즌보다 재밌어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새롭게 번역을 맡은 번역가 황석희의 공이 적지 않다는 것이 제작사인 신시 컴퍼니의 반응이다.
“뮤지컬 ‘원스’의 번역을 제안받은 뒤 이지영 국내 협력 연출가로부터 ‘작품이 좋지만 웃을 구석이 적다’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대본을 읽어보니 의외로 많았어요. 저는 유머 코드를 살리는 것에 집착하는 편인데, 이번에 그게 관객에게 잘 전달된 것 같아요.”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문화 공간에서 만난 황석희는 600편이 넘는 영화를 번역한 스타 번역가다. 케이블 TV의 영상 번역부터 시작해 2013년 ‘웜바디스’부터 본격적으로 영화에 뛰어들었다. ‘말맛’을 살리는 번역이 호평받으면서 ‘데드풀’ ‘스파이더맨’ ‘베놈’ ‘보헤미안 랩소디’ 등 히트 영화를 많이 맡았다. 번역가로는 드물게 TV 예능에 출연할 정도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그는 뮤지컬 ‘원스’의 원작 영화도 번역했다.
“영화 ‘원스’는 원래 (가이 역의) 글렌 핸사드가 이끄는 밴드(더 프레임즈) 홍보를 위해 핸드헬드 카메라로 DVD를 만들려다 나온 거예요. 아카데미상 수상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서사 자체는 거칠고 연출도 투박합니다. 하지만 몇 년 뒤에 나온 뮤지컬 ‘원스’는 영화와 달리 소모되는 캐릭터들이 없고 원작의 비어있던 서사를 채웠어요. 여기에 액터뮤지션(배우가 악기도 연주) 뮤지컬이라 연주로 장면을 부드럽게 전환합니다.”
영화 번역을 전문으로 하던 그가 뮤지컬계의 러브콜을 처음 받은 것은 2019년 뮤지컬 ‘썸씽로튼’의 첫 내한공연 때다. ‘썸씽로튼’이 16세기 셰익스피어에 맞서는 바텀 형제의 고군분투기를 다양한 패러디로 버무린 코미디 뮤지컬이다 보니 개그를 맛깔스럽게 번역할 사람으로 그가 낙점된 것이다. 그리고 ‘썸씽로튼’이 호평받으면서 그는 이번 ‘원스’까지 10편의 공연을 번역했다. 그가 생각하는 영화와 공연 번역의 차이는 뭘까.
“번역은 기본적으로 혼자만의 작업인데요. 영화의 경우 제가 번역한 텍스트를 배급사에 넘기면 사실상 제 일이 끝납니다. 이에 비해 공연 번역은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서 완성됩니다. 영화에서는 제 번역만으로 관객을 오롯이 설득해야 하지만, 공연에서는 제가 모자란 부분을 연출, 안무,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로 채웁니다. 혼자서 모든 텍스트의 설득력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게 저를 덜 외롭게 만들더군요. 공연 번역자는 사실상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을 겸하는 만큼 연습실을 자주 가야만 합니다.”
실제로 ‘원스’ 연습기간 그는 최대한 연습실에 머물렀다. 그리고 연출가 및 배우들에게 원문의 뉘앙스와 감정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직접 몇 곡의 가이드 녹음을 만들어 프로덕션에 전달하기도 했다. 20대 시절 10년 가까이 밴드 활동을 했던 그에게 ‘원스’가 특별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제작사에서 요청한 것도 아니지만 제가 욕심이 났어요. 읊조리듯 부르는 부분이 많은 아이리시 포크는 음표 위에 음절 하나를 올리는 방식으로는 제대로 구현하기 힘들거든요. 그래서 직접 가이드로 들려드리는 게 배우들에게 편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연습실에 다니는 동안 기타를 직접 들고 가 튕기는가 하면 오래전부터 팬이었던 가수 출신 배우 이정열 씨의 사인도 받았습니다. 저의 이런 들뜬 모습을 보며 아내는 예전에 밴드에서 활동할 때의 저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하하”
그는 앞으로도 영화와 함께 뮤지컬 번역도 계속할 생각이다. 그동안 번역을 하면서 자신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경험을 뮤지컬에서 처음 맛보며 매료됐기 때문이다. 현재 그는 여성 화가의 삶을 다룬 브로드웨이 뮤지컬 ‘렘피카’와 동명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바탕으로 한 ‘겨울왕국’의 번역 작업에 한창이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