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유아 성도’와 우광복… 금강 따라 걷다 만난 이름

입력 2025-03-27 19:18 수정 2025-03-27 19:43
충남 논산 병촌성결교회 순교기념관에 있는 '무명유아성도'의 명패.

지난 24일, 충청남도에 진입한 탐방단 버스가 한적한 도로를 달렸다. 차창 너머 느릿하게 흐르는 금강이 물줄기를 드러냈다. 언뜻 보기엔 평화로운 풍경. 드넓은 들판과 텅 빈 길가 풍경은 이곳이 겪고 있는 고요한 쇠락을 말해주는 듯했다. 과거 조선의 젓갈과 곡식, 사람들이 오가던 뱃길은 이제 기억과 신앙의 이야기를 품은 물길로 남아 있었다.

충남 논산 옥녀봉에서 바라 본 금강.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김종혁 목사)은 한국기독교 140주년을 기념해 근대문화유산 탐방을 진행했다. 이날 찾은 충남 논산시 강경읍은 조선 3대 시장, 2대 포구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인구 7000명 남짓의 조용한 마을이다. 1933년 설립된 병촌성결교회(이성영 목사)가 위치한 마을도 고요했다.

교회 한쪽에는 1971년 여름성경학교 단체 사진이 걸려 있었다. 수백 명의 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다. 이성영 목사는 “당시 초등학생만 300명이 넘게 출석했다”며 “지금은 전체 교인이 200명 남짓”이라고 말했다.

충남 논산 병촌성결교회에 걸려 있는 1971년 유년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 기념사진.

교회는 아픈 기억을 품고 있다. 6·25전쟁 당시 병촌성결교회 교인 66명이 북한군에 의해 순교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24년 이 교회를 충청권 기독교인 박해 지역으로 공식 발표했고 과거사진상위원회는 54명을 순교자로 집계했다. 호적에도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갓난아이 9명은 제외됐다.

“예수 믿으면 죽인다는데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 목사는 탐방단을 순교기념관으로 안내하며 조용히 말했다. 내부에는 66명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무명유아 성도’라는 명패도 보였다.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한 아이. 하지만 교회는 그를 성도로 기억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멈춰 설 수밖에 없는 자리. 탐방단은 말없이 그 앞에 한참을 머물렀다.

충남 논산 병촌성결교회.

병촌성결교회의 순교는 단지 비극의 연대기가 아니다. 끝까지 신앙을 고백한 용기이자 자신을 해한 이들을 감싸 안은 용서의 역사다. 이 목사는 “당시 교인들을 학살한 좌익들은 후퇴할 때 가족들을 마을에 남겼다”며 “교회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우며 감쌌다”고 설명했다.

김주옥 집사(후일 장로)는 용서와 사랑을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웃들에게 ‘김 선생’으로 불렸다는 그는 교인들을 죽인 좌익의 자녀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미국 원조 물자가 오면 나눠주고 취직이나 진학에서 연좌제로 불이익을 받을 땐 보증을 서 줬다. 이 목사는 “전쟁의 복수심 대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응답한 것”이라며 “김 장로님의 선택은 가장 숭고한 신앙의 표현이었다”고 강조했다.

강경에서 공주까지 이어진 금강을 따라 탐방단은 다음 날 공주에 도착했다. 공주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활동한 충청지역 여성교육과 애국 운동의 중심지였다. 1906년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가 세운 영명학교는 2019년 보훈지청으로부터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1919년 공주 만세운동을 앞두고 교사와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대형 태극기를 제작했던 사실이 주요 이유였다.

충남 공주에 있는 우광복의 묘. 서만철 한국선교유적연구회 회장은 윌리엄스 선교사 부부가 아들의 이름을 '광복'이라 이름 지었지만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회복할 '복'(復) 대신 복 '복'(福)자를 썼다고 설명했다.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바랐던 윌리엄스 부부는 그 마음을 아들 조지 윌리엄스의 한국 이름 ‘우광복’에 담았다. 서만철 한국선교유적연구회 회장은 “우광복은 훗날 미군정 통역관으로 활동하며 공산정권 수립 시도를 막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며 “한 이름에 담긴 염원이 실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고 말했다. 우광복은 1994년 미국에서 별세하며 “공주의 올리브 누이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학교 뒤 영명동산 언덕에 잠들어 있다.

공주하면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인물은 앨리스 샤프(한국명 사애리시) 선교사다. 1900년 내한해 남편 로버트 샤프 선교사와 함께 공주에서 활동했던 그는 1906년 남편(로버트 샤프)이 장티푸스로 순직한 뒤에도 공주를 떠나지 않았다.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당하기 전까지 39년간 한국 여성 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공주 명선학당 논산 영화여학교 강경 만동여학교 등 20여개 학교를 세워 충청지역 여성 교육의 기틀을 닦았다.

충남 공주에 있는 공주기독교박물관(옛 공주제일감리교회).

박보영 공주기독교박물관 부원장은 “사애리시 선교사는 유관순과 같은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길러냈고 해방 후 자유당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서울 중앙대학교 설립자 임영신, 한국 최초 여자 경찰서장을 역임한 노마리아, 한국 감리교 최초 한국인 여자 목사 전미라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박 부원장은 “특히 샤프 선교사는 유관순을 수양딸로 삼아 이화학당에 편입시켰고 방학마다 유관순은 공주로 돌아와 그의 집에 머물렀다”고 소개했다.

강경·공주=글·사진 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