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학로에서 인기 있는 연극 ‘꽃의 비밀’(~5월 11일까지 링크아트센터 벅스홀)은 가부장적 남편들이 사라진 뒤 고액의 보험금을 타기 위해 아내들이 남자로 변장해 벌이는 소동을 그렸다. 초연 이후 10주년을 맞은 이 작품은 극작가, 연출가, 영화감독인 장진의 데뷔 30주년 기념작이기도 하다.
장진은 지난 1월 ‘꽃의 비밀’ 제작발표회에서 “초연부터 출연하길 바랐던 배우가 이번에 드디어 출연한다”며 기쁨을 표했다. 그 배우는 바로 장영남으로, 이 작품에서 애주가이자 문제 해결사인 ‘자스민’으로 등장한다. 네 명의 아내 가운데 가장 망가지는 코믹한 역할이다.
“장 감독님은 망가진 캐릭터를 제게 맡기길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최근 드라마나 영화의 강한 역할로 이미지가 굳어질까 봐 걱정했기 때문에 이번 역할이 더 좋아요.” 최근 대학로에서 만난 장영남은 장진과 오랜만에 호흡을 맞춘 이번 작품에 애정을 드러냈다. 장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스케줄 때문에 그동안 출연하지 못했지만, 장진의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만큼은 꼭 함께하고 싶었단다.
“초연 공연을 보러 갔다가 운 기억이 나요.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니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당시 아이가 어려서 연극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이후에도 육아 때문에 영화와 드라마보다 연습이나 공연 기간 등 물리적 시간이 많이 필요한 연극을 하기 어려워 캐스팅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영남은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하고 1995년 극단 목화에서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미모와 함께 비음이 섞인 명징한 목소리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2001년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과 2002년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으며 일찌감치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2002년 극단 생활을 마치고 프리랜서로 나섰을 때 그는 장진의 연극 ‘웰컴 투 동막골’에 캐스팅됐다. 나중에 동명 영화에서 강혜정이 연기한 광녀 여일 역할이다.
“장 감독님이 제가 출연한 극단 목화의 공연을 보러오신 적이 있으세요. 선배지만 학교를 같이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친분이 없었을 때인데요. 당시 정신이 이상한 살인자를 연기하는 저를 재밌게 보시고 여일 역으로 캐스팅하셨어요.”
LG아트센터 개관 기념작이었던 연극 ‘웰컴 투 동막골’은 큰 화제를 모았고, 장영남의 연기 역시 호평받았다. 이후 장영남은 장진의 영화 ‘아는 여자’ ‘박수칠 때 떠나라’ ‘거룩한 계보’ ‘굿모닝 프레지던트’ 등에 잇따라 출연하며 대중에게 얼굴을 각인시켰다.
“‘아는 여자’가 저의 첫 상업영화인데, 장 감독님이 ‘아르바이트 한 번 할래’라고 하셔서 출연했어요. 당시 상업영화에 오디션을 보러 갈 생각을 못 했을 때인데요. 장 감독님 덕분에 영화와 드라마 등 매체에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장 감독과의 인연으로 장영남은 2011~2012년 SNL코리아 시즌 1~2의 크루로도 참여했다. 2011년 장영남이 결혼식 전날까지 SNL코리아 생방송에 참여한 것은 유명하다. 장 감독은 이번 ‘꽃의 비밀’ 연습중 신뢰하는 배우 장영남의 아이디어를 반영해 일부 장면을 좀 더 코믹하게 만들기도 했다. 장영남은 “내가 은인인 장 감독님의 30주년 기념 공연을 어떻게 빠질 수 있겠냐”며 웃었다.
아이가 크며 육아의 부담이 조금씩 줄자 그는 2018년 LG아트센터의 ‘엘렉트라’로 7년 만에 무대에 돌아온 뒤 꾸준히 연극에 출연하고 있다. 2022년 ‘리처드 3세’, 2024년 ‘구름을 타고 가는 소녀들’에 이어 이번 ‘꽃의 비밀’까지 점점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그는 “연극은 나를 살아있게 만든다”면서 “물론 무대는 배우에겐 가혹하기도 하다. 2018년 ‘엘렉트라’ 때 엄청난 혹평을 받았다. 오랜만의 무대라 연기에 대한 자기검열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신을 번쩍 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나를 깨어나게 만드는 연극에 꾸준히 출연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