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하회마을, 탈춤 신명 어디 가고 무거운 긴장만

입력 2025-03-26 17:26
안동하회마을 초입 골목에 소방대원들이 살수차를 배치하고 호스를 펼치고 있다. 이임태 기자

하회탈의 익살스런 표정과 탈춤 난장의 신명 대신 무거운 침묵 속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안동하회마을. 26일 낮 2시 마을 하늘 전체를 뒤덮은 자욱한 연기 속에 한옥과 초가집들이 낮게 앉아 있었다. 평소 같으면 평일에도 하회탈춤이 펼쳐지는 상설공연장 입구에는 소방지휘소와 진화차량, 진화복을 입은 대원들만 보였다.

하회1리 권영길(63) 이장은 지쳐보였다. 권 이장은 “어젯밤을 꼬박 새웠다. 우리 마을은 다 한옥이고 초가인데 불이 들어왔다 하면 끝장”이라고 말했다.

소방당국은 하회마을에 분당 최대 7만리터를 살수하는 대용량 살수포를 배치해 두고 있었다. 국내에 2대 뿐인 것으로 알려진 이 장비는 이날 세계유산을 지키기 위해 병산서원 주변 산을 향해 세차게 물을 뿜었다.

물줄기는 서원 뒷산을 적셨고 유사시엔 직벽으로 서있는 서원 앞 병산의 산등성이 너머도 적실 수 있을 만큼 강력해 보였다.
대용량 살수포가 26일 병산서원과 주변 산으로 물줄기를 쏘고 있다. 이임태 기자

하회마을 안 돌담길 사이 사이에는 여지없이 소방차가 세워져 있고 진화복을 입은 대원들이 소방 호스를 사방으로 펼쳐둔채 대기했다. 임진왜란 극복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 종택 충효당 앞에도 전담 소방차가 배치돼 있었다.

충효당을 비롯해 양진당, 류성룡 종가유물·문적, 병산서원은 보물로 지정돼 있고, 화경당과 원지정사, 빈연정사, 염행당 등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에도 소방인력이 꼼꼼히 배치됐다.

128세대 229명이 살아가는 하회마을은 전체가 유네스코 유산이면서 전체가 박물관 격인 덕에 집중적인 보호를 받고 있었다.

소방당국은 “산불이 하회마을과 직선거리 5㎞ 지점에서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있고 어느정도 진화된 상황이지만 완전진화 때까지 최대한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세계유산을 철통경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권영길 이장은 소방과 경찰, 공무원에 마을 경비를 맡기고 자신은 고령의 주민들을 돌보는데 집중했다.

산불 접근 소식이 전해진 25일 하회 주민들은 어르신을 대피시키기 위해 자체 조를 짰다. 어르신을 자동차까지 데려다주는 ‘업는 조’, 차에 태워 광덕1리 마을회관까지 모시는 ‘운송조’, 회관에서 어르신을 돌보는 ‘돌봄조’다.

하회는 특히 고령자가 많아 안동시청 공무원인 하회관리사무소 직원 6명도 광덕리 회관에서 함께 잠을 자며 어르신들을 돌봤다. 정성을 다했지만 99세 할머니는 구토를 했고, 97세 할머니는 설사를 했다.

100세 할아버지는 광덕리 회관으로 대피했다기 기어이 고집을 부려 하회 집으로 돌아왔고, 26일 다시 대피하자는 권유를 뿌리친채 집을 지키고 있다. 100년을 산 노인들이 600년 넘도록 조상 누대로 지킨 집을 떠나니 몸이 먼저 아팠다.
서애 15대 종손 류창해씨가 충효당 대문 앞에서 마을 내력과 산불 대비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임태 기자

서애 15대 종손 류창해씨는 “하회마을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마을인만큼 일족들과 함께 마음을 모아 지키고 있다”며 “어서 재난이 물러가고 하회는 물론 피해를 입은 모든 국민이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안동=이임태 기자 si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