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때문에 미국 공연 거부’ 두 클래식 거장 잇따라 내한

입력 2025-03-26 15:45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시프(왼쪽)와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Nadja Sjostrom, GiorgiaBertazzi.

독일을 대표하는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58)는 지난 2월 말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항의하는 뜻으로 올해 미국 8개 도시 투어를 취소했다. 그런가 하면 ‘피아니스트들의 교과서’로 불리는 헝가리 출신의 영국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안드라스 시프(71) 역시 테츨라프와 같은 이유로 올해 가을 독주 투어와 내년 봄 뉴욕 필하모닉 및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협연을 취소했다. 두 거장의 미국 공연 취소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과거에 미국 예술가들이 전쟁, 독재, 불의에 항의하기 위해 해외 공연을 취소했지만 이제 미국이 예술가들에게 버림받는 나라가 됐다고 한탄했다.

공교롭게도 두 거장이 올봄 나란히 한국을 찾는다. 먼저 시프가 28일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과 3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악단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와 공연한다. 시프가 1999년 창단한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는 오케스트라에 소속돼 있지 않고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솔리스트와 실내악 연주자들로 구성됐다. 고령의 시프가 최근 악단 해체를 발표함에 따라 이들의 내한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시프와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는 이번에 바흐의 ‘건반 악기를 위한 협주곡’ 3번과 7번,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과 오페라 ‘돈 조반니’ 서곡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연주한다.

195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현재 영국에 거주하는 그는 앞서 고국 헝가리의 독재 정권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 두 나라에서 공연 중단을 선언한 바 있다. 2010년 오르반 빅토르 총리의 재집권 이후 헝가리에 가지 않고 있는 그는 고국에 돌아오면 손이 잘릴 것이라는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는 최근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꾸짖는가 하면 캐나다, 그린란드, 가자에 대한 팽창주의적 위협을 가하는 것에 놀랐다. 또한, 독일의 극우 정치인들을 지원하는 것에 화났다”면서 “트럼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추함을 가져왔다.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동참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내 보이콧이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지만 ‘바다의 물 한 방울’이라도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테츨라프는 5월 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 2일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서 2년 만의 내한공연을 연다. 테츨라프는 지난 2019년엔 서울시향의 상주 음악가를 역임하는 등 한국 관객들과도 매우 친숙하다.

테츨라프의 내한 리사이틀 프로그램은 오스트리아 작곡가 수크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네 개의 소품’과 독일 작곡가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우크라이나 출신 폴란드 작곡가 카롤 시마노프스키의 ‘신화’와 프랑스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로 구성됐다. 이번 프로그램 중 수크는 테츨라프가 최근 집중하는 작곡가다. 테츨라프는 근래 수크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피아노 5중주를 녹음했고 현악4중주도 연주한 바 있다.

테츨라프는 최근 화상 인터뷰를 통해 “현재 미국 정부와 그곳에서 확산하는 공포, 유럽에 사는 제 삶을 고려했을 때 미국에서 공연을 지속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느꼈다”면서 “음악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타인을 배려하고 자유와 개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상기시키는 의미도 가진다”며 최근 미국 투어 이유를 설명했다.

이날 테츨라프는 베토벤 영웅 교향곡을 예로 들며 “처음엔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싸우던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생각으로 작곡했지만, 그가 스스로 황제가 되는 순간 베토벤은 배신감을 느끼고 헌정을 철회했다”며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에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연주자가 좌파 성향인가, 우파 성향인가 하는 정치적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에 관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