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 성명서까지 낼 줄 몰랐다. 내가 오히려 상처를 많이 받았다.”
유인촌 장관이 최근 국립국악원 조직개편과 국악원장 선임, 국립예술단체 이전 등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추진 정책에 대한 예술계의 거센 반발에 대해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국악계에서 80% 이상이 기존처럼 국악계 인사가 국립국악원장을 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면 따르겠다고 했다. 이는 지난 21일 경기도 가평군 캐나다전투기념비에서 열린 한국-캐나다 공동 창작뮤지컬 ‘링크’ 제작발표회에서 현안에 대해 기자들과의 문답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날 유 장관은 예술가들을 돕기 위해 공연계 시스템을 바꾸려는 자신의 선의를 몰라준다는 표현을 여러 차례 했다.
하지만 유 장관이 받은 상처는 예술가들이 유 장관과 문체부에 받은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예술가들은 문체부가 ‘지역 문화 균형 발전’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현장의 목소리는 듣지 않은 채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 두려움과 함께 분노를 느낀다. 대통령 탄핵 절차로 정권의 지속 여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문체부가 국립예술단체 이전 등 공연 생태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모습이 오만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국립예술단체를 비롯해 공연 현장에서 조사나 공청회 등 공론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문체부는 권위적인 하향식 일방주의 정책 하달로 예술계를 좌지우지하려 하고 있다.
“예술가는 행정에서 손떼고 예술만 해라”
앞서 유 장관이 기자간담회나 예술가들과의 미팅에서 언급한 이야기를 돌이켜보면 최근 국립국악원이나 국립예술단체와 관련한 정책은 방향성이 분명해 보인다. 우선 ‘예술과 행정의 분리’다. 유 장관은 예술과 행정을 분리함으로써 예술가들이 예술만 편하게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기관 또는 단체 운영에 필요한 예산, 조직, 직제 등의 문제에 대해 예술가는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술가는 예술만 전념하면 된다는 ‘예술과 행정의 분리’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예술계를 관리 대상으로 만들겠다는 행정 편의주의의 의도가 보인다. 이는 문체부가 최근 예술과 행정을 분리해야 한다면서 행정은 문체부 전·현직 공무원이 맡는 것을 당연시하는 태도에서 알 수 있다. 문체부는 예술가 출신 기관장의 실패 사례를 들지만, 그 반대의 사례도 적지 않다. 국립발레단과 광주시발레단을 활성화해 한국 발레의 위상을 높이고 시장을 키운 발레리나 출신 최태지 전 단장의 사례는 대표적이다. 유 장관 본인도 예술가 출신 행정가인데, 예술가 출신 행정가를 폄하하는 것은 이율배반으로 보인다.
게다가 문체부 공무원이 예술 단체나 기관의 행정 전문가라는 전제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동안 문체부 공무원이 국립국악원, 국립극장 등 소속기관에서 근무하거나 문체부 퇴직 공무원이 국립예술단체 등 산하기관 사무국장 등으로 와서 도움이 됐느냐고 물었을 때 현장에서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해당 기관이나 장르에 대한 이해가 적다 보니 근무 기강 강화와 예산 삭감에만 주력한 경우가 많아서다. 오히려 현장에서는 국립예술단체(기관)에서 꾸준히 성장한 직원들이 행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들이야말로 탁상공론이 아니라 장르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단체(기관)의 운영과 비전을 효율적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장에서 성과가 있었던 사례들은 공무원이 아니라 단체(기관)의 직원, 즉 기획자 출신 기관장일 때에 많이 나왔다.
“국립예술단체 경직성과 기득권 깨야 한다”
유 장관의 또 다른 방향성은 ‘국립예술단체의 경직성과 기득권을 깨는 것’이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4 공연예술 조사’에 따르면 국공립 예술단체는 국립 14개, 공립(광역) 65개, 공립(기초) 282개를 합한 361개다. 이들 국공립 예술단체는 대부분 정년 60세까지 일정한 월급을 받는 전속 단원제이면서도 오디션이나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 보니 일부 단체를 제외하곤 경쟁력이 낮다.
과거 국공립 예술단체의 설립 초기엔 단원들이 비상임인 데다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예산이 늘고 예술가의 처우 개선 요구가 높아지면서 점차 단원 상임화가 이뤄졌다. 하지만 단원 고령화 심화 속에 인건비 증가에 반비례해 사업비 비중이 점점 줄면서 완성도 있는 작품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연 횟수도 적어 공공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나아가 신입 단원 정원이 없다 보니 청년 예술가들은 연수 단원이나 프로젝트 단원으로 활동하는 데 그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역에서는 청년 예술가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서울로 상경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국공립 예술단체를 가리켜 ‘공공근로’ 또는 ‘철밥통’이라고 비아냥거릴 정도다.
이런 문제 때문에 지난해 설립된 서울시발레단과 충북도립극단 그리고 올해 지역에 설립되는 4개 장르 국립청년예술단체(한국무용, 전통연희, 연극, 오케스트라) 역시 시즌 및 프로젝트 단원제로 단체의 유연성을 꾀하고 있다. 국공립 예술단체 단원의 경우 겸직 금지 및 개인 레슨 등 외부 수익 활동이 금지돼 있지만, 시즌 및 프로젝트 단원의 경우 단체와 계약한 작품 연습 및 공연을 제외한 시간에는 다양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
만약 문체부의 계획대로 국립예술단체의 이전이 이뤄진다면 공무원에 준하는 기존의 단원제를 약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당장 서울에 남는 것을 택하는 단원도 등장할 것이고, 그 자리는 시즌 단원으로 채워지게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 장관이 예술의전당에 새로 만들겠다는 전속 오페라단, 발레단, 오케스트라 역시 시즌 단원제로 운영될 전망이다. 참고로 예술의전당은 지난 21일 난데없는 유 장관의 발표에 당혹해하고 있다.
예술계에 대한 유 장관의 편견과 자기확신
공연계에서는 문체부가 추진하는 국립예술단체의 지역 이전이 ‘월급 받는 예술가’에 대한 유 장관의 반감도 작용한 것으로 본다. 배우 시절 민간 극단을 운영했던 유 장관은 국립예술단체의 경직성을 자주 비판한 바 있다. 다만 공연계에서는 기존의 인적 자원을 활용해 어느 정도 성과를 내는 국립예술단체들보다 경직성이 심각한 지역 공공 예술단체에서 먼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상업성이 없고 전통 보전의 가치가 큰 장르나 단체까지 시즌 단원제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지자체가 국립예술단체의 예산 때문에 성급히 유치했다가 단원제 문제가 더욱 복잡해져서 ‘계륵’ 신세가 될 것으로 예상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공연계에서는 국공립 예술단체의 공공성과 예술가의 고용 안정성에 대한 논의가 공연계 전체에서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체부는 중장기 문화비전 ‘문화한국 2035’와 관련해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소통 대신 복종을 요구한다. 예술계에 대한 ‘선의’를 아무리 강조해도 유 장관의 발언에 신뢰가 가지 않는 이유다. 게다가 예술계에 대한 유 장관의 편견이나 자기확신도 최근 추진하는 문화정책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실례로 유 장관은 국립발레단과 관련해 안무를 못하는 단장의 문제를 지적했고, 국립무용단에 대해서는 ‘맨발’로 추는 것을 비판했다. 이것은 유 장관이 발레와 한국 창작춤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보여주는 사례다. 규모가 작은 컨템포러리 발레단의 경우 안무가가 중심이지만, 클래식 발레를 기본으로 하면서 다양한 레퍼토리 축적이 필요한 메이저 발레단은 무용수 출신 단장(예술감독)이 적지 않다. 당장 ‘발레의 종가’ 파리오페라발레가 21세기에 새롭게 도약한 것은 발레리나 출신의 브리지트 르페브르가 1995~2015년 예술감독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스타 무용수를 배출하고 앙줄랭 프렐조카주, 피나 바우쉬, 제롬 벨, 보리스 샤르마츠 등 여러 안무가들의 작품을 가져오거나 신작을 위촉했기 때문이다. 또한 국립무용단은 전통을 기반으로 한 한국 창작춤을 선보이는 단체인 만큼 전통적인 춤부터 현대적인 몸짓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매번 저고리 입고 버선 신고 추는 춤은 국립국악원 무용단에서 복원과 재현을 위해 하고 있다.
끝으로 국립예술단체가 단원제 등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은 국가의 예술에 대한 기본 책무를 지켜야하기 때문이다. 국립이 아니라면 상업성이 없는 예술, 보존이 중요한 예술, 국가를 대표할 브랜드 작품은 누가 만들 수 있겠는가. 최근의 사태로 오랫동안 쌓아온 국립예술단체를 망가뜨렸을 때 그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제대로 복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덧붙여 정책이란 현장의 의견을 두루 듣고 예상되는 문제점까지 논의한 뒤에 발표하는 게 기본이다. 그런데, 최근 문체부는 국립예술단체 통합을 발표했다가 예술계의 반대와 국회의 지적이 나오자 취소했고, 국립국악원장 선임과 관련해서는 국악계의 여론을 알아보겠다고 말을 바꿨다. 이는 정책 수립의 순서가 바뀐 것 아닌가.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