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할머니 라이드하고 믹스커피 타는 MZ목사입니다’

입력 2025-03-24 07:00 수정 2025-03-24 07:00
박지현 목사가 아들 박수호군과 함께 지난 12일 충남 논산 신기2리의 한 비닐하우스 딸기밭에서 일하고 있는 할머니들을 찾아가 간식을 전해주고 있다.

“미정이네 엄니 일한다는 소문 듣고 찾아왔슈. 음료랑 간식 가져왔으니 하나씩 드시고 욕보슈.”

지난 12일 오후 3시 충남 논산 신기2리의 한 비닐하우스 딸기밭. 70~80대 할머니들이 딸기 솎아주기에 한창인데 젊은 남성이 출출할 때 맞춰 양손 가득 간식거리를 사 왔다. 그의 정겨운 사투리에 어르신들 얼굴엔 금세 웃음꽃이 피어났다. 젊은이 대다수가 도시로 떠날 때 시골을 택한 이는 1988년생 박지현 목사다. 일하던 손을 잠시 멈춘 88세인 김용희 할머니는 “우리 목사님은 이 동네 아들이나 다름없다”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박 목사도 “사람들은 제가 어르신들을 돌본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우리 가족과 교회를 돌봐주신다”며 겸연쩍은 듯 웃었다.

노인 마을에 온 젊은 부부 목사
박지현 목사와 서유미 사모가 아들 박수호군과 함께 지난 12일 충남 논산 신기2리의 마을회관에서 동네할머니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박 목사가 이끄는 신은감리교회는 60가구가 전부인 작은 마을 한가운데 있다. 주민 대부분이 홀로 사는 노인으로 평균 연령이 70대 중반을 넘는다. 박 목사는 지난해 3월 이 마을에 왔다. 서유미(36) 사모, 다섯 살 아들 수호와 함께.

어릴 적 충남에 살았기에 익숙할 줄 알았지만 목사가 돼 가족과 정착하는 건 완전히 달랐다. 모든 게 낯설었다. 시골 목회 환경도 녹록지 않았다. 1970년 세워진 교회엔 열 명 남짓한 성도가 전부였다. 절반 이상은 70~80대 어르신이다.

박지현 목사의 아들 박수호군이 지난 12일 충남 논산 신기2리에 있는 밭에서 동네 할머니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외지인에 대한 텃세도 없지 않았다. ‘젊은 목사 양반이 얼마나 가겠느냐’며 의심 어린 시선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을 돌며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눴고, 커피믹스를 타서 함께 마시며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자식 이름을 따 ‘00이네’로 부르는 게 익숙한 이 동네에서 박 목사 가정이 ‘수호네’로 불리는 덴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년이 지난 지금은 마을회관에서 어르신들과 2시간씩 수다 떠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박 목사는 “무조건 들이대야 친해진다”며 “어느 순간 어르신들도 우리랑 진짜 교류하려고 하신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어르신이 힘에 부쳐 하는 일을 돕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디지털 도어락이 고장 나면 한달음에 달려가 고쳤고 10㎏짜리 깨 자루를 번쩍 들어 옮겼다. 읍내 볼일 있거나 병원에 가야 할 땐 기사도 자처했다. 지난해 어버이날에는 마을회관에 함께 모여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돼지 불고기, 장조림, 부침개 같은 맛 난 것을 만들어 수시로 나누기도 했다. 서 사모는 “많이 가졌기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딸기밭서 시작하는 심방 “친구 같은 목사님”
박지현 목사가 지난 12일 충남 논산 신기2리의 마을회관에서 동네 할머니들에게 직접 얼굴 마스크팩을 붙여주고 있다.

박 목사 부부의 심방 코스는 밭에서 시작한다. 딸기밭과 씨감자밭을 돌면서 간식을 나눈다. 그리곤 마을회관에 들른다. 기자와 동행한 12일 목사 부부는 마을회관에서 쉬는 어르신에게 마스크팩으로 기쁨을 드렸다. 얼굴에 얹으면 동물 얼굴이 나오는 재밌는 모양을 일부러 준비했다고 했다. 박 목사가 “10년은 더 젊어지실 거유”라고 너스레에 떨며 토끼 호랑이 얼굴이 나오는 마스크팩을 붙이자, 어르신들은 소녀처럼 웃었다.

전금남(83) 할머니는 “24세 시집와서 지금까지 이렇게 친구처럼 지내는 목사님은 처음”이라고 했다. 강추남(75) 할머니도 “우리 말동무도 돼 주고, 심심하지 않게 해준 덕분에 마을 분위기가 확 좋아졌다”고 칭찬했다. 이들 옆에 함께 누워있는 서 사모는 여우팩을 얼굴에 붙이고 “엄니 다음엔 재밌는거 뭐할까요. 음..매니큐어 이쁘게 바를까? 노란거, 빨간거..”라고 중얼거렸다.

서유미 사모가 박수호군과 함께 지난 12일 충남 논산 신기2리의 마을회관에서 할머니들의 얼굴에 직접 마스크 팩을 붙여주고 있다.

박 목사 부부가 어르신들에게 자식 역할을 해내는 것처럼 그들도 젊은 부부 가정을 아들·딸처럼 여기고 챙겨준다. ‘사모님 생일’이라면서 직접 밥을 해다 준 어르신도, 직접 딴 것이라며 집 앞에 딸기며, 상추며 먹을거리를 놓고 가는 이웃도 많다. ‘수호 간식 사주라’며 용돈을 주기도 한다. 박 목사는 “우리 교회와 마을은 사랑과 돌봄의 순환 속에 있다”고 자평했다.

박 목사가 아들과 함께 윗마을에 전도 나갔다가 ‘손주가 타던 자전거’라면서 선물해준 할아버지도 있었다. 킥보드를 타고 따라 온 아이가 꼭 손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마을의 유일한 어린이이자, 미성년자인 수호는 어르신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다. 서 사모는 “서울에선 낯을 엄청나게 가렸는데, 이젠 이웃과 스스럼없이 지낸다”고 했다.

살려고 내려간 곳서 희망 만나다
박지현 목사와 서유미 사모가 아들 박수호군과 함께 지난 12일 충남 논산 신기2리에 위치한 신은감리교회 앞에 서 있다.

박 목사 부부는 이곳에 ‘살기 위해’ 내려왔다. 부산의 한 대형교회에서 부목사로 바쁘게 일하고, 이후 교회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박 목사에게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서 사모는 “이러다가 남편을 잃겠다 싶었다”며 시골행을 제안했다. 남들에게 사랑을 퍼주고, 정작 자신을 돌보진 못했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목원대 신학과 CC(캠퍼스 커플)이었다.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받은 사랑 덕분인지 박 목사 가정은 서서히 평안을 찾아갔다. 결혼 8년 만에 첫째 아들을 어렵게 가졌던 부부는 시험관 시술로 둘째를 가지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시골에 내려온 뒤 자연스레 둘째가 생겼고 현재 임신 6개월 차다.

그는 목회자로서 복음의 최전방에 선 어르신들을 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한다. 박 목사가 목회하는 지난 1년 동안 마을 어르신 4분이 세상을 떠났다. 교인이든 아니든 박 목사는 마을 주민의 일원으로서 유가족을 찾아가 위로하고 있다. 박 목사 부부는 인스타그램에서 시골에서 이웃과 사는 소소한 이야기를 영상에 담아 전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만난 2400명이 넘는 팔로워들이 응원 댓글을 달고 식재료를 보내주는 등 동역자 역할을 하며 함께 걸어간다.

박 목사는 “지난 성탄절에 예수님 생일잔치라며 떡국을 끓여 동네 어르신을 초대했는데 세 분이나 오셨다”며 “90년 가까이 살면서 교회 문턱을 처음 넘어본다는 한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성공한 목회자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웃었다. “우리가 이웃을 돌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며 “서로 사랑하고 관계를 맺으며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또한 “시골에 와보니 비로소 ‘사람 사는 것 같다’는 걸 실감한다”며 시골 공동체가 단순한 이웃 관계를 넘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곳임을 강조했다. 서 사모는 “도시에서는 우리가 돕는 역할을 할 때만 관계가 형성되지만, 시골에서는 도움을 요청해야 할 때도 많다”며 “벌집이 생기거나 독사가 나타날 때, 효과적인 약이 무엇인지 등은 인터넷에서도 찾기 어려운 정보라 이웃들의 도움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논산=글·사진 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