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큰 눈에 뽀얀 피부의 사내아이가 미용실 문 앞에서 두리번거렸다. “지미, 하이 컴 온!” 아들을 부르며 아이의 엄마가 미용실로 들어왔다. 나는 첫눈에 그녀의 세련된 매너와 예의 바른 모습에 호감이 갔다. 아주 정중하고 진지하게 예약을 원했고 비용과 시간까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성실하게 상담해 준 직원에게 친절하다는 칭찬의 말도 잊지 않았다. 다시 우리 업소를 찾아온 그녀에게 잘 생긴 그의 아들을 칭찬하자 만면에 미소 띤 얼굴로 은근히 남편 자랑을 했다. “자기 아빠를 꼭 닮았어요.”
남편은 독일인인데 미 8군의 수석 엔지니어이며 시댁은 가톨릭 사제 집안으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가문이라고 했다. 그날부터 수년 동안 친구 겸 정든 고객이 되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진솔한 얘기들을 나누었고 나와 동갑내기여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녀에게서 어린 시절 가난 속에서 힘겨웠던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가난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소학교 교장이었는데도 역시 생활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미군 부대 가까이 살던 때 아버지의 권유로 영어 공부를 했으며 얼마 후에는 미군 부대 관리직 사무원으로 취업이 되는 행운을 얻었단다. 수년간 그곳에서 근무하던 중에 지금의 남편인 지미 아빠를 만나 결혼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그녀에게는 이미 두 아들이 있었고 나는 둘째 딸을 임신한 상태였다. 내가 딸을 낳자 축하한다며 고급스러운 아기 침대를 보내 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 아름다운 침대를 잊지 못한다. 그녀가 산후조리하는 내 단칸방을 찾아올 때면 나는 부끄러웠다. 우리가 버스 요금도 절약해야 할 때 그녀는 빨간 폭스바겐을 몰고 다녔다. 어느 날 내 마음을 읽은 듯 심각한 표정으로 “나는 그대가 부러워요”라고 했다. 소꿉장난 같은 내 환경을 부럽다기에 단순히 나를 위로하는 말이려니 가볍게 여겼다.
충청도 예산이 고향인 그녀는 명절에 친정에 갈 때면 마치 전쟁터를 향해 가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어느 설 명절날 혼혈아인 네 살짜리 아들 손을 잡고 어린애는 등에 업고 시골 오솔길을 들어서는데 언제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여기저기서 돌멩이가 날아오더라는 것이다. 이리저리 돌팔매를 피하며 큰 아이는 뒤로 숨기고, 업힌 애는 보자기로 덮어씌우는데 이런 내용의 노래가 들려왔다는 것이었다.
양양 양갈보를 바라볼 때면,
호박 같은 얼굴에다 분을 바르고
높고 낮은 삐딱 구두에
전기에 벼락 맞은 지진 대가리
보아라 쥐 잡아먹은 붉은 입술을
부모의 가슴에 못 박을 년아
“나 양갈보야, 지미 엄마 아니야. ” 그녀는 흐느꼈다. 그녀는 당장 조국을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들,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모멸감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자기 자신의 나라 대한민국뿐 아니라 남편의 나라 독일에서도 역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아픔들이 그녀를 우울증에 시달리게 했으며 자주 위험한 생각을 갖기도 했다는 말에 놀랐다. 나는 미안해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물 속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국제결혼의 테두리도 너무 두터웠지만 부부 사이에서 겪게 되는 문화의 이질감과 정서의 괴리감이 더 많은 고통이었다고 했다. 그저 ‘쓰다’ ‘달다’라고만 할 뿐 씁쓸하다거나 달콤하다는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 전달이 안 되더라는 것이다.
언어로 해결되지 못한 아픔이 마음에 겹겹이 쌓여 화병이 되었나 보다. 결국 죽음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녀의 남편은 거액의 전세 비행기를 주문해서 일본으로 후송해 명의의 손에서 아내를 살려낸 헌신적인 남편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국경을 초월한 가족 사랑에 감동했다. 친구는 국력을 자랑하던 독일인의 민족적 자존심과 우월감이 부럽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산업이 하루속히 성장하여 방방곡곡 가난이 물러가길 기도한다는 친구의 말이 지금도 새록새록 생각난다.
얼마 후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떠난다며 그녀가 찾아왔다. 내 손을 꼭 잡고, “친구야! 나도 그대처럼 살고 싶어. 한국 남자와 결혼해서 사는 것은 분명 큰 축복이야, 나는 네가 세상에서 가장 부럽단다”라며 울먹거렸다.
사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 수많은 지미 엄마들이 우리나라에 이주해 왔다. 시골 산간 벽촌까지 동남아의 딸들이 이 땅에 둥지를 만들어 살고 있다. 지난 세월 동안 세계 곳곳에 뿌리내리고 사는 우리 이민 1세들도 똑같은 아픔을 겪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느덧 지구촌의 대로에 서 있다. 침몰해 가는 경제의 암울함은 허리띠라도 더 졸라맨다지만 어느새 다문화 국가가 돼 버린 이 땅, 이젠 다른 시각으로 미래의 후손을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머지않아 우리의 산업 현장 곳곳이 모자이크 문화권으로 바뀔 것이다. 아니, 벌써 바뀌어 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넓은 사랑으로 외로운 지미 엄마들을 품어주어야만 할 것이다. 행여 그들이 밤마다 설움에 젖어 잠들지 않도록 저들의 안녕을 기원하자.
<낮은 곳으로>
-김국애
길가에 황홀한 가을
우수수 어깨 위에 떨어진 낙엽
생명은 한 방울 이슬인 것을
더 높이 오르려는 허탄함뿐
절정의 숭고한 아우성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땅에 떨어진 고운 잎
어제의 품위와 고결함 접은 채
섬김의 삶 찾아 내려앉았다
◇김국애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계간 현대수필 운영이사, 수필집 ‘길을 묻는 사람’ 저자. 이메일 gukae8589@daum.net
전병선 선임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