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살았던 흔적만이 남아있는 세상, 고양이는 누군가가 살던 아늑한 집을 홀로 지키고 있다. 어느 날 자신을 쫓던 개들을 가까스로 따돌린 고양이는 개들이 허겁지겁 되돌아 뛰는 것을 보고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뒤이어 사슴 떼가 같은 방향에서 우르르 몰려오고, 곧 거대한 물살이 온 숲을 뒤덮는다.
삶의 터전이 물에 잠겨 위기를 맞이한 고양이 앞에 때마침 낡은 배가 다가온다. 고양이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홍수를 피해 배에 올라탄 카피바라, 골든 리트리버,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와 끝을 알 수 없는 항해를 시작한다.
올해 미국 아카데미·골든 글로브·영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프랑스 세자르영화제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 트로피를 싹쓸이한 ‘플로우’가 오는 19일 개봉한다. 이 영화는 라트비아에 최초의 아카데미상을 안겼다.
어쩌다보니 한집살이를 시작한 동물들은 몸짓과 소리로 소통한다. 혼자가 익숙했던 고양이를 비롯해 서로를 경계하던 동물들은 점차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투닥대기도 하지만 서로의 행동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위기에 처했을 땐 기지를 발휘해 서로 돕는다.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은 각 동물의 특성을 잘 잡아내 관객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준다. 물을 무서워하고 다른 동물들에게 다가가길 조심스러워하던 고양이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동료들을 위해 물고기를 잡으러 물 속으로 뛰어든다. 늘 꼬리를 흔들며 친구를 반기는 다정하고 충직한 골든 리트리버는 무해한 웃음을 선사한다.
여우원숭이는 집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바구니에 모아 가지고 놀며 손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기도 하고, 산만한 와중에 홀로 명상을 하는 익살스런 모습을 보여준다. 고양이를 공격하는 자신의 무리와 맞서다 날개를 다치고 따돌림을 당한 뱀잡이수리는 배의 조타수를 담당하며 결국 동물들을 위해 희생한다.
생존을 위해 연대하는 동물들의 모습은 위기 속에서도 화합하지 못하고 자기 잇속만 차리는 인간들과 비교된다. 영화는 대홍수의 시기와 장소를 특정하지 않았지만, 기후 위기에 처한 오늘날의 지구를 생각하게 한다. 마지막 쿠키 영상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질발로디스 감독은 동물의 특성을 세밀하게 관찰해 캐릭터들의 눈빛과 행동을 실감나게 스크린으로 옮겼다. 고양이가 높은 곳으로 뛰어오를 때처럼 피사체의 움직임을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카메라 워킹, 일렁이는 물결과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햇살 등 자연의 빛과 색채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화면은 실사 영화 못지않다.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사운드상을 받기도 한 ‘플로우’는 섬세하고 생생하게 만들어진 소리를 통해 대사 없이도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천지를 뒤덮는 거대한 물소리, 각종 동물들이 내는 소리 등이 관객들로 하여금 주인공 고양이처럼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든다.
독립영화가 오스카 애니메이션 부문 트로피를 거머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플로우’는 ‘인사이드 아웃 2’(픽사), ‘와일드 로봇’(드림웍스) 등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의 작품들을 제쳤다.
질발로디스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 수상이 전 세계 독립영화 제작자들에게 문을 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배에 타고 있고, 서로의 차이점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수상 소감을 밝혔다. 러닝타임 85분, 전체 관람가.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