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가 국제 여성의 날을 앞두고 여성 살인(Femicide)을 별도로 규정한 새로운 형법 초안을 승인했다. 2023년 이별을 요구했다가 남자친구인 필리포 투레타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줄리아 체케틴 사건이 계기가 됐다. 하지만 여성 단체 등에선 실질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국제 여성의 날인 8일(현지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전날 성명을 통해 “정부는 여성 폭력 근절과 피해자 보호를 위해 추진해 온 체계적인 조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됐다”며 “내각은 법체계에 여성 살해 범죄를 독립적인 범죄로 도입하고 종신형을 선고하는 매우 중요한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말했다.
해당 법안에 따르면 여성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종신형까지 받을 수 있게 된다. 또 이 법안은 개인적 학대, 스토킹, 성폭력, 리벤지 포르노 등에 대한 가중 처벌 기준도 담고 있다.
해당 초안은 이탈리아 상·하원을 통과해야 확정된다. 다만 보수 정권뿐 아니라 중도 좌파 야당에서도 이를 환영한 만큼 통과엔 문제가 없을 전망이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남성 중심 문화가 강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 이탈리아 내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발생한 여성 살인 사건은 113건에 달한다. EU의 성평등 지수에서도 14위에 불과하다.
이탈리아의 여성 혐오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 2023년 11월 필리포 투레타 사건이다. 당시 투레타는 이별을 통보한 전 연인이자 대학교 동기인 체케틴을 칼로 70번 이상 찔러 잔혹하게 살해했다. 체케틴은 당시 이탈리아 내 명문 파도바대학교에서 생체의공학 학위를 받기 며칠 전이었다. 투레타는 먼저 졸업하는 체케틴에 대한 질투와 독점욕 등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전해졌다. 독일로 도주했다 붙잡힌 그는 지난해 12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사건 이후 이탈리아 전역에선 남성의 폭력과 통제 등 가부장적 문화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열렸다. 체케틴의 장례식엔 멜로니 총리를 포함해 8000명 이상이 참가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15세 남성이 교제하던 13세 여성을 발코니에서 밀어 살해하는 등 잔혹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다만 일각에선 법적 규제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긴 어렵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이탈리아 여성인권단체인 ‘논 우나 디 메노’의 활동가 세레나 프레다는 “이건 단지 선전일 뿐”이라며 “우리는 학교에서부터 직장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을 괴롭히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이현 기자 2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