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 오르는 두 ‘보허자’… AI 만난 국악 또는 창작 창극

입력 2025-03-05 06:00
국립국악원 정악단이 지난달 25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연습실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행악과 보허자’ 공연 일부를 시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보허자’(步虛子)는 중국 송나라에서 전래돼 고려와 조선의 궁중음악이 된 악곡이다. 국내에서는 주로 임금의 만수무강과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의미로 연주됐다. ‘허공을 걷는 자’라는 뜻의 ‘보허자’는 원래 불로장생하는 도교의 신선을 가리킨다.

공교롭게도 ‘보허자’란 제목을 단 두 공연이 오는 13일 나란히 무대에 올라간다. 국립국악원 정악단의 ‘행악과 보허자’와 국립창극단의 ‘보허자 : 허공을 걷는 자’. 두 작품은 전통예술의 종가로서 복원과 재현에 무게중심을 둔 국립국악원과 전통에 기반을 둔 동시대적 공연예술의 창작을 지향하는 국립극장의 차이를 보여준다.

국립국악원 정악단이 지난달 25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연습실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행악과 보허자’ 공연 일부를 시연하고 있다. 국립국악원

국립국악원 정악단이 13~14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선보이는 ‘행악과 보허자’는 조선 왕실의 행차 음악을 보여주는 무대다. 행차 음악은 왕이 궁을 나설 때 연주하는 ‘출궁악’, 행차 중 연주하는 ‘행악’, 궁으로 돌아올 때의 ‘환궁악’, 환궁 이후 베푸는 잔치에서의 ‘연례악’으로 구성됐다. 이번 무대는 관객의 이해와 흥미를 높이기 위해 연출적 요소를 더했다. 출궁과 환궁, 왕과 백성의 조우 등의 서사적 요소를 도입했다. 또한, 왕의 역할을 맡은 무용수가 무대에 올라 행차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이번에 눈길을 끄는 것은 연례악으로 연주되는 ‘보허자’다. 총 3장으로 구성된 ‘보허자’는 1장과 2장엔 노랫말까지 전해지지만 3장은 선율만 전해진다. 정악단은 이번에 아트플랫폼 유연 등과의 협업으로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노랫말을 창작했다. 효명세자의 한시 350편을 기본으로 학습시킨 뒤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의 한시 100여 편을 대조군으로 설정해 3장의 노랫말을 창조했다. 이건희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은 “정악의 외연을 확장하고 연례악의 웅장한 멋을 전하기 위해 가사를 창작했다”며 “가객 70여 명의 합창으로 공연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악 아이돌’로 불리는 김준수가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열린 신작 ‘보허자 : 허공을 걷는 자’ 연습실 공개 및 라운드 인터뷰에서 주요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립창극단이 13~20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올리는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는 조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과 그의 권력욕에 희생된 동생 안평대군을 소재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한 창작 창극이다. 이야기는 계유정난으로부터 27년 후 안평대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무심이 노비에서 면천된 후 당대 최고 화가 안견, 안평대군의 애첩 대어향, 이름 모를 나그네 및 그에게만 보이는 혼령과 함께 ‘몽유도원도’가 보관된 대자암으로 떠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궁중음악에서 제목을 따왔지만, 의미는 다르다. 이 작품에선 발 디딜 곳 없이 허공을 배회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즉 삶이 무참하게 꺾인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자유로운 삶에 대한 불가능한 꿈을 담았다. 다만 국립국악원과 내용은 달라도 궁중음악 ‘보허자’의 주요 선율을 일부 활용했다는 점에서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국립창극단 단원들이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열린 신작 ‘보허자 : 허공을 걷는 자’ 연습실 공개 및 라운드 인터뷰에서 주요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작품의 창작진으로 참여한 극작가 배삼식과 작창가 한승석은 국립창극단이 ‘창극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앞서 배삼식은 ‘리어’ ‘트로이의 여인들’, 한승석은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귀토’에 참여한 바 있다. 그리고 연극계의 주목받는 연출가 김정이 이번에 창극 연출로 처음 도전한다. 출연진으로는 나그네(안평) 역으로 ‘국악 아이돌’ 김준수가 맡고 혼령(수양) 역으로 이광복이 나선다. 이외에 무심 역에 민은경, 대어향 역에 김미진, 안견 역에 유태평양이 참여한다. 도창은 김금미가 맡는다.

유은선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은 “창극의 소재로 고전 등 다양한 작품을 각색하는 것도 좋지만 한국만의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왕가의 비극을 다룬 이번 작품은 기존에 선보였던 창극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을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