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현지시간) 밤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7회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아무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3주년을 맞은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가자지구 전쟁이나 팔레스타인 문제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영국 가디언은 올해 오스카 시상식은 정치적 발언으로 뜨거웠던 지난 몇 년과 달랐다고 전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도 “상대적으로 정치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며 “워싱턴은 먼 나라 같았다”고 보도했다.
이날 시상식 사회자인 코난 오브라이언은 오프닝 멘트에서 로스앤젤레스 산불 피해를 얘기했을 뿐 정치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사회자인 지미 키멀이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인 트럼프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다. 심야 토크쇼 ‘지미 키멀 라이브!’ 진행자인 키멀은 오프닝 멘트에서 영화 ‘가여운 것들’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에마 스톤을 소개하면서 “에마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국정연설에 반박 연설을 한 여성처럼 어린아이의 뇌를 가진 성인 여성을 연기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이 시상식이 진행되는 와중에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역대 오스카에서 지미 키멀보다 최악인 진행자가 있었나”라며 키멀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자 키멀은 시상식이 끝날 무렵에 “트럼프 대통령님,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깨어 있다니 놀랍네요. 감옥에 갈 시간이 지나지 않았나요?”라고 응수했다.
‘브루탈리스트’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애드리안 브로디는 이날 수상 연설에서 특정한 정치 상황을 거론하지 않은 채 “더 건강하고 행복하며 포용적인 세상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다. 또 “과거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 있다면 증오를 방치하지 말라는 교훈이라고 믿는다”고 얘기했다.
우크라이나나 러시아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었다. 편집상 시상자로 나선 배우 대릴 해나가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이란 표어를 말하고, 사회자 오브라이언이 작품상, 감독상 등 5관왕에 오른 ‘아노라’를 언급하며 “누군가가 강한 러시아인에 맞서는 장면을 마침내 본 미국인들이 즐거워하는 것 같다”고 얘기한 정도다.
앞서 2022년과 202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영상 메시지가 상영됐다.
이스라엘 군인들에 의해 점령된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공동체가 파괴되는 과정을 그린 ‘노 아더 랜드’는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이 영화를 공동 연출한 팔레스타인 운동가 바젤 아드라와 이스라엘 언론인 유발 아브라함의 수상 소감은 이날 시상식에서 가장 정치적이었다. 유발 아브라함은 가자전쟁의 정치적 해결을 촉구하면서 “여기 이 나라의 외교정책이 그 길을 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가디언은 올해 시상식 참가자들은 정치적 언급을 피했지만 후보에 오른 영화들은 정치를 피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다큐멘터리 영화 ‘노 아더 랜드’를 비롯해 이날 시상식의 주인공이었던 독립영화 ‘아노라’와 ‘브루털리스트’ ‘리얼 페인’ 등은 전쟁과 이민, 홀로코스트, 성소수자 등을 다룬 작품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성공 신화를 비판적으로 조명한 ‘어프렌티스’도 후보작이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