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호 목사·보길도 동광교회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가량이었더라.”(삼상 22:2)
다윗의 아둘람 굴에 40명이 살아도 여러 번 난리가 났을 텐데 착한 인생을 산 사람들도 아닌, 온갖 문제를 안고 살아온 400명의 사람들을 다윗은 어떻게 좁은 굴에서 통솔했을까요.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은 온갖 상처와 사연을 가진 모난 성격의 사람들이 분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훗날 그들이 다윗 왕국에서 보석같이 쓰임 받는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치 복음이 들어가면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 근처에 살던 어떤 여인의 인생이 변화되고 회복돼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진가를 나타낼 수 있다는 증거처럼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지금 3년째 성실하게 주일을 지키는 이채두 성도님이 계십니다. 몇 년 전 뇌졸중을 당하신 어른인데 지금은 지팡이에 의지하고 걸음이 다소 힘들어도 주일에는 반드시 교회에 나오십니다. 그분이 사시는 읍내에서는 이 성도님이 교회 다니는 것 자체를 기적으로 여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
이분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습니다. 읍내에서 다방을 한 개도 어려운데 두 개를 운영하신 분입니다. 수십 명 되는 직업여성들을 다루면서 준법 질서를 감시하는 관공서에 불려 다니고 동네 건달들에게도 맞서가면서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내는 직업여성들을 고용해 사업하셨습니다. 아마도 이분이 걸어온 지난 길은 엄청나게 험하고 고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병들어 늙었고 이제 다 내려놓고 계획에도 없던 신앙의 삶을 새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성도님은 주일 아침이면 길가 의자에 10분 전부터 먼저 와서 저를 기다립니다. 그 모습을 보면 과거 억세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초라한 노인이 교회 승합차를 기다리는, 측은한 모습만 눈에 들어옵니다.
이채두 어르신은 가끔 제게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귀가 안 들려서 목사님 설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목사님이 좋아서 교회 옵니다.” 이 말을 들으면 괜히 무능함이 제게 밀려듭니다. 에베소의 두란노서원에서 설교하던 사도 바울 목사님처럼 손수건만 만져도 병이 낫는 기적도 능력도 없고 하박국(3:17) 말씀처럼 아무것도 없고, 온통 없어서 수가성 여인 같은 이분에게 뭔가 해줄 것 없는 저를 바라봅니다.
섬마을 교회는 어부들을 비롯한 모든 교회 구성원들이 마치 아둘람 굴에 모여든 사람들과 어쩌면 저렇게 흡사한 형편을 간직하고 있는 것인지 이 성도님을 작년에 세례를 베풀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어르신은 기회만 되면 한때 자신이 잘 나갔다고 자랑하고, 자기가 눈만 부릅뜨면 누구든 벌벌 떨었다고 쌍팔년도식 뻥을 치면서 자랑을 했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화려한 과거가 아니라 약하고 아프고 외롭고 힘들어서 다른 이들에게 자랑해도 먹히지 않으니 만만한 목사 앞에서 폼 한번 잡아보려고 과시하십니다. 그런 어르신을 보면서 ‘나는 좋은 목사가 될 수 있을까’ 자문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도 ‘보일러 고쳐 달라’ ‘담장 막아달라’ ‘배를 수리해 달라’고 어부들이 부탁했는데 이것을 모두 해결했다고 목회를 잘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교인들은 그들 스스로 자기 발로 걸어 교회에 온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가 아둘람 굴이 돼주겠다고 전도해서 섬마을 이곳저곳에서 환난과 원통함을 가진 분들이 오셨고 지금은 성도가 됐습니다. 그렇기에 옛날 다윗 왕 시대에 아둘람 굴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전도는 사람들을 데려왔다고 자동적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물에 고기가 들어갔다고 잡은 것은 아니듯 말입니다. 좋은 어부는 잡은 고기를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