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주인공인 소설 쓰는 작가들…"허구에 힘 싣는 방법"

입력 2025-03-0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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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는 뉴욕 맨해튼에 머물던 중 이스라엘에 사는 친척에게서 "TV에 네가 나오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로스는 나흘 뒤에도 이스라엘의 소설가 아하론 아펠펠드에게서 "네가 조만간 예루살렘에서 강연한다고 신문에 실렸다"는 연락을 받는다. 누군가 로스를 사칭하는 게 분명하다.
 

하필 로스는 잘못된 수면제의 부작용으로 불안과 우울 장애에 시달리다가 가까스로 회복기에 접어든 상태라 몸과 마음이 약해져 있고, 사칭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다.
 

그 사이 사칭범은 점점 대담하게 로스인 척하며 정치적 주장까지 설파하고 다닌다. 그는 유대인이 이스라엘에서 사는 대신 과거 그랬던 것처럼 유럽으로 가서 유럽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로스는 사칭범을 대면하기 위해 이스라엘로 떠나고, 그곳에서 뜻밖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첩보 작전인 '샤일록 작전'에 가담하게 된다. 샤일록은 셰익스피어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한 악독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의 이름이다.
 

저명한 작가 필립 로스(1933∼2018)에게 실제 벌어진 일로 착각하기 쉽지만, 이는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소설 '샤일록 작전'(원제 'Operation Shylock')에 담긴 이야기다. 이 작품은 1993년 미국에서 처음 발표됐다.
 

작가는 소설의 서문에서 "법적인 이유로 여러 사실을 변형해서 이 책에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또 "이 책에 실린 이야기는 내가 50대 중반에 겪은 일들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옮긴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소설은 1994년 펜/포크너상 수상작이다. 유대인 국민국가 건설(시오니즘)과 유대인의 유럽 회귀(디아스포리즘) 사이 정치적 갈등을 분열된 두 자아의 갈등으로 보여주며 호평받았다. 

최근 국내 번역 출간된 미국 작가 아야드 악타르(53)의 장편소설 '홈랜드 엘레지'(원제 'Homeland Elegies') 역시 작가 본인이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소설은 파키스탄 출신 부모 아래서 태어나 작가로 성공한 악타르의 시선으로 본 미국의 모습을 담고 있다. 미국의 백인 우선주의와 이슬람 혐오 등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소설로 2020년 출간 후 화제가 된 작품이다.
 

이야기는 악타르의 아버지가 심장질환 전문의로서 1993년 당시 사업가였던 도널드 트럼프를 진찰하며 인연을 맺는 데서 시작한다.
 

미국의 자유와 자본주의를 찬양해온 아버지는 그후 트럼프에 호감을 지니게 되고, 트럼프가 2016년 대선에 출마하자 그에게 투표한다.
 

무슬림인 아버지는 트럼프가 반(反)이슬람 정책을 공약으로 내거는데도 맹목적으로 트럼프를 지지한다. 악타르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가) 혹시 노망이 난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고 한다.
 

작가 악타르는 소설 속 악타르와 거의 모든 면에서 일치한다. 파키스탄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2013년 퓰리처상을 받는 등 극작가 겸 소설가로 큰 성공을 거뒀다.
 

소설가가 자신과 동일한 인물을 주인공 또는 화자로 내세우는 것은 독자가 소설이 허구라는 것을 잊고 몰입하게 하는 장치로 자주 활용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1935∼2023)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만연원년의 풋볼', '체인지링',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등 여러 소설에서 작가 자신과 동일 인물이나 다름없는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절친한 친구인 유명 영화감독의 여동생과 결혼했고,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등 대중에 알려진 오에 겐자부로의 생애와 소설 주인공의 설정이 서로 일치한다.
 

이외에도 '샤일록 작전'의 필립 로스는 '미국을 노린 음모'에서도 자신과 동일한 이름의 인물을 등장시켰고, 튀르키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73)은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에서 주인공의 아들로 등장한다.
 

이처럼 작가 자신을 소설에 등장시키는 이유는 허구인 소설을 조금이라도 더 진짜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다. 오에 겐자부로는 소설 '우울한 얼굴의 아이'에서 주인공 어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그 이유를 설명한다.
 

"고기토(작중 주인공의 이름)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으니까. 거짓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왜 정말로 있는 것, 있었던 일을 거짓과 혼란스럽게 '섞어' 놓은 걸까요? 그거야 거짓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 샤일록 작전 = 김승욱 옮김. 572쪽.
▲ 홈랜드 엘레지 = 민승남 옮김. 5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