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디or보기] ‘골프 우영우’ 이승민이 쓰는 끊이지 않는 감동 스토리

입력 2025-02-28 06:00
올 시즌 차이나투어 시드를 획득한 이승민. 볼미디어

수 년 전 시각 장애인 골프대회에 서포터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만났던 한 시각 장애인 골퍼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빛을 전혀 감지할 수 없는 중증 전맹 장애를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에게서 어두움이라곤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시종일관 유쾌한 입담으로 오히려 주변의 어둠을 걷히게 하는 듯 했다. ‘정상인보다 세상을 더 밝게 보는구나’라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국내 유일의 자폐성 발달장애 골프 선수인 이승민(28·하나금융그룹)이 올 시즌 중국 프로골프투어 출전권을 획득했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졌다. 골프 선수에게 있어 정규투어 출전권 획득은 어느 투어를 막론하고 고시 합격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이승민이 거둔 쾌거는 감동의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정상인도 감내하기 어려운 각고의 노력과 의지로 이뤄낸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례는 시차를 두고 필자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이승민의 경우는 경외심마저 들었다. 골프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라 할 만큼 정상인도 어려워하는 운동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출전 선수 204명 가운데 13위로 상위 40명에게 주는 2025시즌 차이나 투어 시드를 획득했다. 그보다 앞서 4라운드로 치러진 1차 예선에서 4위로 본선에 진출했다.

4살 때 자폐성 발달장애 판정을 받은 이승민은 6살 때부터 밖에서 땀을 흘리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랬던 그가 처음 배운 운동은 골프가 아닌 아이스하키였다. 선수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서 본인이 원한 데다 어머니 박지애씨도 아이의 사회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랬던 이승민이 골프로 전향한 것은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였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발달장애 특성상 단체 경기에서는 동료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못해 개인 운동으로 전환해야겠다는 어머니의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틈틈이 골프를 했던 것도 한몫했다.

이승민의 삶은 골프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면서 180도로 확 바뀌었다. 장애 등급은 2급에서 3급으로 낮춰졌고 사회성과 친화력도 확연히 좋아졌다. 2017년에 한국프로골프(KPGA)투어 정회원 자격을 획득한 뒤 2018년 KPGA투어 DB손해보험 프로미오픈 등 작년까지 KPGA투어 5개 대회에서 컷을 통과했다.

뿐만 아니다. 2022년 미국골프협회(USGA)가 주관하는 제1회 US어댑티브오픈과 지난해 유럽 장애인 골프협회(EDGA)에서 주관하는 대회에서도 우승했다. 그러면서 세계 장애인 골프 랭킹(WR4GD)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승민이 캐디 겸 스윙코치인 윤슬기씨의 도움을 받으며 티샷 준비를 하고 있다. 볼미디어

프로골퍼 이승민이 있기까지는 여러 사람의 손길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어머니 박지애씨의 헌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들이 장애 판정을 받은 뒤 평생을 장애를 안고 살아 가야 한다는 생각에 하루하루를 죄인의 심정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 자폐성 발달장애에 대한 정보나 인식이 없었다. 답답한 상황에서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은 중증이 아니어서 교육, 훈련 통해 치료하면 호전될 수 있다는 소견이었다. 아이와 정상적인 대화가 되면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시키면 되는데 그 또한 불가한 것이어서 모든 게 암울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생각은 일단 뒷전으로 미루고 아이 곁에 있을 때 최대한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어 보려고 애썼다. 엄마, 아빠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아들이 조금이라도 더 온전하게 세상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런 헌신이 알려지면서 어머니 박지애씨는 2022년에 모 언론사로부터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했다. 마침 US어댑티브 출전 직전이었다. 그리고 엄마의 받은 상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된 이승민은 장애인 US오픈으로 불리는 US어댑티브 우승으로 화답했다.

올해로 10년째 아름다운 동행을 이어 오고 있는 하나금융그룹의 후원도 이승민에게는 큰 힘이 되는 게 당연하다. 하나금융그룹은 장애인, 저소득 소외계층, 다문화가정 등을 지원하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지속적으로 이행했다. 2005년부터는 국내 골프 발전을 위해 골프에 대한 후원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16년에 자폐성 발달장애 3급의 장애가 있는 이승민이 KPGA 투어프로 1차 선발전에서 공동 10위를 기록해 KPGA 준회원 자격을 획득했다는 소식을 듣고 후원을 시작하게 됐다. 하나금융그룹의 소외되는 사회 구성원이 없도록 개인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는 스포츠 지원 목적 일환인 셈이다.

하나금융그룹은 패럴림픽에서 골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 꼭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싶다는 이승민의 꿈이 실현될 때까지 후원을 이어갈 계획이다. 꼭 그 뿐만 아니다. 한 걸음씩 자신의 꿈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승민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오래도록 함께할 것을 분명히 했다.

마지막으로 스윙코치 겸 캐디, 그리고 친구이자 든든한 버팀목인 윤슬기씨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둘은 6년 전에 캐디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자폐성 발달장애의 특징 중 하나가 더러 공격적 성향을 보일 때가 있는데 윤슬기씨 앞에만 서면 순한 양이 된다.

둘은 올겨울에 태국 치앙마이에서 90일간 혹독한 동계훈련을 했다. 훈련 결과 드라이버샷 비거리가 늘어 평균 300야드는 너끈히 찍는다. 게다가 쇼트 게임도 기술적으로 좋아졌다.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많아져 리커버리율이 대폭 높아졌다.

뿐만 아니다. 겨울 동계 훈련을 거치면서 사회적 인지 능력, 표현력도 더 좋아졌다. 이승민은 자신의 잘못된 스윙 습관을 ‘개다리’로 통칭한다. 윤슬기씨가 스윙 때 왼 축이 먼저 무너지거나 퍼팅시 머리가 먼저 들리는 행동을 보고 개다리 하면 안 된다고 지적한 뒤부터다. 이번 동계 훈련 결실은 ‘개다리 안 하면 더 좋아지냐’는 이승민의 갑작스런 질문에서 시작됐다는 게 윤슬기씨의 설명이다.
2월 23일 중국 더듄스앳 선저우 패닌술라에서 막을 내린 2025 차이나투어 큐스쿨에서 13위로 합격해 시드를 획득한 이승민이 엄지척을 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볼미디어

자폐성 발달장애의 특징은 한 가지에 집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승민의 포커싱 능력은 평균치보다 더 월등하다. 다시 말해 게으름을 전혀 피우지 않는다. 과제를 주면 간혹 하늘을 쳐다보거나 콧노래를 흥얼거리긴 하지만 결코 자리를 벗어나는 일은 없다. 그게 이승민의 가장 큰 무기다.

이승민은 요즘 들어 부쩍 노래를 즐겨 부른다. 자폐증 장애자로서는 쉽지 않아 흔한 경우는 결코 아니다. 어머니는 최근 들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성가도 배운 영향 같다고 귀띔한다. 차이나 투어 시드를 손에 넣은 뒤 골프에 대한 자신감이 더 생기게 된 것도 그를 노래하게 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이승민은 요즘 들어 자존감도 커졌다고 한다. 최근 들어 성적이 좋을 때면 “엄마 나도 이제 동생들에게 자랑스런 형이 된거지”라는 질문을 하는 게 그 방증이다. 그는 차이나투어 퀄리파잉 3라운드를 마치고 나서 “못하면 동생들에게 창피한데…”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런 자존감이 4, 5라운드에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져 시드를 손에 넣게 된 원동력이 됐다.

올해 차이나 투어는 총 25개 대회가 열린다. 이승민은 최선을 다해 내년 시드 유지를 목표로 잡고 있다. 또 초청 선수로 출전하는 KPGA투어 SK텔레콤오픈과 하나은행 인비테이셔널에 서도 좋은 성적을 내고 싶다. 그의 꿈을 응원한다.

정대균 골프선임기자 golf56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