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정 LG아트센터장 “역삼의 유산을 마곡에서 꽃피웁니다”

입력 2025-02-26 07:24 수정 2025-02-26 08:04
서울 마곡에 위치한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이현정 센터장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이 센터장은 1996년 LG아트센터 개관준비팀에 사원으로 입사해 2021년 센터장으로 임명됐다. LG아트센터

한국에서 LG아트센터의 위상은 ‘믿고 보는 공연장’이라는 수식어에서 잘 드러난다. 2000년 3월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의 옛 LG강남타워(현 GS타워)에서 문을 열었던 LG아트센터는 동시대를 대표하는 세계적 거장들과 국내외 주요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소개하며 컨템포러리 공연 시장을 개척했다. 또 국내 최초로 초대권 없는 공연장을 선언하고 기획공연 시즌제와 패키지 티켓 제도 등을 도입해 공연계 패러다임을 바꿨다. 여기에 2001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시작으로 장기 대관을 도입해 한국 뮤지컬 산업화의 초석을 놓았다.

그런데, 2005년 LG그룹과 GS그룹의 계열 분리에 따라 LG강남타워가 GS그룹 소유로 남게 되면서 LG아트센터는 셋방살이하는 입장이 됐다. 이후 강서구 마곡 지구에 LG그룹 R&D 단지 조성과 함께 LG아트센터도 2022년 3월 서울식물원 안에 건립된 새로운 공연장으로 이사 왔다. 그리고 그해 10월부터 ‘LG아트센터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관객과 다시 만나고 있다. 다만 공공기여시설로 건립이 추진되면서 LG아트센터는 서울시 기부채납 후 사용 수익권을 확보해 20년간 운영하는 형태다.

컨템포러리 공연 선도부터 장르 스펙트럼 확대

서울 마곡 지구 서울식물원 안에 자리잡은 LG아트센터 서울의 외관.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 (c)BaeJihun, LG Arts Center

올해는 LG아트센터의 개관 25주년이자 마곡 이전 3주년이 되는 해다. LG아트센터는 역삼에서 22년간 867편의 공연으로 450만 명의 관객을, 마곡 개관 후 2년 3개월 동안 113편의 작품으로 65만 명의 관객을 만났다. 최근 국민일보와 만난 이현정 센터장은 “LG아트센터가 그동안 한국 공연 문화의 변화를 일으켜 왔다고 자부한다. 무엇보다 충성도 높은 회원, 즉 공연장의 팬을 만든 것을 빼놓을 수 없다”면서 “나아가 LG아트센터처럼 민간기업이 사회 공헌을 위해 비영리로 운영하는 극장이 성공적인 운영으로 한 나라의 대표 공연장으로 성장한 경우는 전 세계에서도 드물다”고 성과를 자평했다.

이 센터장은 금융계에서 일하다가 공연에 대한 애정으로 1996년 12월 당시 역삼 LG아트센터 개관준비팀에 사원으로 입사했다. 그리고 공연기획팀 팀장과 공연사업국장을 거쳐 2021년 12월 센터장으로 임명됐다. 이 센터장의 취임은 LG아트센터가 역삼 시대의 기억과 유산을 마곡에서 이어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사로 평가받았다.

그가 이끄는 마곡 시대 LG아트센터의 방향성은 무엇일까. 역삼 시대보다 장르의 스펙트럼이 한층 넓어지고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강한 공연이 많아졌다는 평가다. 특히 지난 2년간 제작한 대극장 연극 ‘파우스트’ ‘벚꽃동산’, 소극장 연극 ‘나무 위의 군대’ ‘타인의 삶’은 관객 12만 명, 평균 매표율 97%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배우 전도연과 박해수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은 ‘벚꽃동산’은 올해 9월 홍콩과 11월 싱가포르 투어가 예정돼 있으며 내년 호주, 프랑스, 미국 투어를 협의 중이다.

LG아트센터가 사이먼 스톤 연출로 제작한 연극 ‘벚꽃동산’. 스타 배우 전도연과 박해수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은 이 작품은 올해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투어 공연을 가진다. (c)LG아트센터

“LG아트센터의 방향성은 마곡 이전을 준비하기 시작한 2015년부터 고민한 부분입니다. 역삼에선 1103석 대극장 하나뿐이었지만 마곡에선 1335석 대극장과 최대 365석 블랙박스 소극장으로 극장과 객석이 모두 늘어납니다. 그만큼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게 됐는데요. 마곡에서 관객을 새롭게 개발하려면 컨템포러리 문화를 계속 선도하는 방향 대신 극장의 경험치를 높여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선택과 집중’으로 방향성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서울 서남권 관객 증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실시

LG아트센터는 마곡으로 이전하면서 공연 외에 다양한 프로그램으로도 관객 개발에 나섰다. 공원 안에 있는 데다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공연장답게 하드웨어를 활용한 교육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주변 기업과 학교로부터 공연과 연계한 강의와 공연장 투어 의뢰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아이들의 경우 공연장 방문으로 느끼는 친밀도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노력 덕분에 LG아트센터는 마곡에서 연평균 29.5만 명의 관객이 방문, 역삼에서보다 1.5배 많은 수치를 기록했다.

“역삼보다 마곡의 관객이 증가한 것은 객석 수가 늘어난 영향도 있지만, 기획 공연의 매표율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역삼은 평균 매표율 74%였는데, 마곡에 와서는 85%나 됩니다. 관객 분포를 보면 역삼에서는 강남·서초·송파 3구가 탑3에 들어 전체의 30%를 차지하는 데 비해 마곡에서는 강서·강남·마포 3구가 탑3이며 34%입니다. 특히 강서·양천 등 서남권의 관객이 역삼에서 4.3%였다가 마곡에서 23%로 늘어난 게 눈에 띕니다.”

매튜 본 안무 ‘백조의 호수’는 LG아트센터에서 그동안 여러 차례 공연될 때마다 큰 인기를 끌었다. (c)Johan Persson

서남권을 중심으로 관객층을 넓혀가는 것에 비해 역삼에서 충성도 높았던 관객들은 여전히 마곡에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는 모양새다. 이에 대한 LG아트센터의 대책은 관객이 공연장에서 즐겁고 특별한 경험을 함으로써 다시 찾아오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 센터장은 “마곡은 서울 어디서든 ‘도어 투 도어’로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게다가 지하철에서 LG아트센터까지 바로 이어져 있어서 한번 와보면 물리적 거리는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서 “또한 LG아트센터에서 좋은 작품을 관람하는 것 외에 공연장 안팎에서 편안함과 쾌적함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할 곳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공연계에서 좋은 작품이나 아티스트의 가치와 의미를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LG아트센터는 마곡으로 이전하면서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한층 강화했다”고 강조했다.

옛 역삼 공연장에서 개관하는 GS아트센터

그런데, 리모델링을 마친 옛 역삼 공연장이 GS아트센터로 오는 4월 개관하는 것은 LG아트센터 입장에서 신경이 쓰이는 소식이다. GS아트센터의 개관 프로그램은 컨템포러리 공연에 중점을 뒀던 예전 LG아트센터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유동 인구가 많은 장소적 이점 때문에 GS아트센터는 벌써 뮤지컬계가 선호하는 대관 공연장으로 떠올랐다. 흥미롭게도 GS아트센터는 최근 개관 간담회에서 관객과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예전 공간에 대한 기억과 유산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피나 바우쉬 안무 ‘카네이션’. LG아트센터의 2000년 개관작으로 국내에서 처음 선보였던 이 작품은 25년 만에 다시 한국 관객과 만난다. (c)Oliver Look

이에 대해 이 센터장은 “아무래도 같은 민간극장이고 LG아트센터가 사용했던 공간이다 보니 신경을 안 쓸 수는 없다. 하지만 주옥같은 공연들로 채워진 LG아트센터의 역사는 공간이 아니라 극장이 만든 것이다. 그 유산은 고스란히 마곡으로 가져왔다”면서 “GS아트센터가 앞으로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 갈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올해 개관 25주년을 기념하는 LG아트센터의 기획 공연은 김선욱&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4월 5일)를 시작으로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6월 18~29일), 영국 로열 발레 ‘더 퍼스트 갈라’(7월 4~6일) 등 9편이 준비됐다. 이 가운데 현대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쉬의 ‘카네이션’(11월 6~9일)은 LG아트센터의 2000년 개관작이라서 의미를 더한다. 그리고 이자람 판소리 ‘눈, 눈, 눈’(4월 8~9, 11~13일), 전인철이 연출하고 이영애 등이 출연하는 연극 ‘헤다 가블러’(5월 7일~6월 8일), 양손프로젝트의 연극 ‘유령’(10월 16~26일)은 LG아트센터가 이제 한국 아티스트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제작에 나섬으로써 해외에도 작품을 내보내는 공연장으로 도약하려는 방향성을 보여준다.

이 센터장은 “25년간 관객만 생각하며 일관성 있게 공연장을 운영할 수 있었던 건 모기업 LG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면서 “저희 같은 민간기업이 운영하는 비영리 극장에 대한 가치 인정이 있어야 더 많은 기업들이 문화에 대한 후원을 늘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당부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