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계가 잔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국의 기후 특성상 잔디 생육이 쉽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올해는 날이 풀리기 전인 겨울로 개막을 앞당겨 문제가 더 심화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규정 보완과 잔디 품질 개선을 위한 투자, 전문 인력 충원 등이 이뤄지지 않는 한 ‘추춘제 전환’도 섣부르다는 평가다.
그간 한국 축구계에선 잔디 관리가 오랜 골칫거리였다. 국가대표 A매치 경기를 홈에서 치를 때면 나쁜 잔디 상태가 늘 도마 위에 올랐고, 주최 측 역시 더 나은 잔디를 찾아 헤매곤 했다. 서울에서 열릴 것으로 보였던 내달 A매치 2연전을 고양과 수원 경기장에서 치르기로 최근 결정한 것도 잔디 영향이 컸다.
올 시즌엔 평소보다 개막 일정이 당겨지면서 열악한 잔디 상태가 부각되기도 했다. 클럽 월드컵과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ACL) 등 국제 대회 일정이 맞물린 탓도 있지만 최근 논의 중인 추춘제의 리허설 격으로 여겨지면서 현장에서의 우려는 더욱 커졌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12월 중순∼2월 중순에 8주가량 휴식기를 갖는 추춘제 전환 시나리오를 공개한 바 있다.
류주현 이앤엘 잔디연구소장은 25일 국민일보에 “기후 위기로 인해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면서 한국의 잔디 생육 환경은 점점 열악해지고 있다”며 “잔디 상태가 개선되더라도 추춘제 전환은 조금 더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고 짚었다.
가장 불만이 많은 건 열악한 잔디 위에서 경기를 치러야 하는 선수들이다. 지난 23일 이승우(전북현대)는 2라운드 경기 후 “이런 피치에서 준비하는 게 말이 안 된다”며 “정상적인 축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직격했다.
무엇보다 선수들의 부상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당시 경기 중 전북의 전진우와 콤파뇨가 부상을 얻었고, 대전 하나시티즌의 이순민도 쇄골 골절로 전열을 이탈하는 등 시즌 초반부터 부상주의보가 짙게 깔렸다.
이근호 프로축구선수협회장은 국민일보와 전화 통화에서 “육안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여도 골대 근처나 경기장 사이드 등 그늘진 곳은 축구화가 제대로 박히지 않아 정말 위험하다”며 “선수들의 부상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잔디 개선 논의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전했다.
연맹이 올해부터 그라운드 불량에 따른 경기장 변경 규정을 만들긴 했지만 아직 구멍이 많다. 연맹이 이번에 신설한 대회 요강 19조에 따르면, 공식경기가 예정된 경기장의 그라운드 상태가 정상적인 경기를 치를 수 없을 정도로 불량하다고 판단되면 원정 클럽의 홈 또는 제3의 경기장으로 장소를 변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구체적인 지표는 없고 잔디 관리자의 정성 평가에 의존해 한계가 있다.
연맹 관계자는 “개막 전에 구단에 연락을 돌려서 잔디 상태를 확인했지만 선수들이 느끼기엔 부족함이 있었던 것 같다”며 “잔디만 관리하는 부서인 ‘피치 어시스트’팀을 곧 발족해 대응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누리 기자 nur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