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그는 궁정동 안가에서 최고 권력자와 그의 경호실장을 총으로 살해했다. 그는 이튿날 전두환 사령관이 지휘하는 보안사령부에 의해 체포됐고, 한 달 만에 군법회의에 기소됐다. 12월 4일, 그에 대한 1심 재판이 시작됐다. 1심 재판부는 재판개시 16일 만에 사형을 선고했다. 2심, 3심 재판도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확정됐다. 그리고 나흘 뒤,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소위 ‘10·26사태’의 주역 김재규 이야기다.
공교롭게도 12·3 내란사태의 후폭풍이 거센 요즘 시기에 법원이 김재규의 ‘내란목적살인 등 혐의’에 대한 ‘재심’ 개시 결정을 했다. 재판부는 ‘기록에 의하면 수사관들이 김재규를 수사하면서 수일간 구타·전기고문 등 폭행과 가혹행위를 했음을 인정할 수 있다’며 그를 수사했던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 소속 수사관들의 폭행·가혹행위를 문제 삼았다. 따라서 폭행·가혹행위죄를 저지른 수사관들의 강압적인 수사 결과를 기초로 기소와 재판이 이뤄졌으므로, 재판을 다시 해서 다시 유무죄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법원의 심문기일에선 그의 최후진술 녹음이 일부 재생되기도 했다. “10·26혁명은 이 나라 건국이념이요, 국시인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하여 혁명한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우리가 6·25를 통해 수난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의 생명을 바쳐 지켜온 것입니다. 이 혁명이 어찌해 내란죄로 심판받아야 합니까. 10·26혁명은 순수한 것입니다. 집권욕이나 사리사욕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오로지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재심 법원에서는 어쩌면 그에게 ‘내란 목적’을 뗀 ‘살인죄’만 인정하면서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을 선고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민사, 형사 할 것 없이 재심 절차 및 요건이 몹시 까다롭다. 재심 재판을 받으려면 재심 개시 절차를 먼저 거쳐야 하고, 확정판결을 깰 만한 고도의 개연성이 있어야만 한다. 재심 사유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새로운 증거’는 재심 대상이 되는 확정판결의 소송절차에서 발견되지 못하였거나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제출할 수 없었던 것이어야 한다.
이러니 법원에서 재심 개시 결정을 받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다.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사건,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수원노숙소녀 상해치사사건, 낙동강변 살인사건,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이 어렵게 어렵게 별을 딴 사례다. 최근에는 수면제 탄 술을 먹여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김신혜 씨가 25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무죄판결을 받기까지 오랜 수감생활을 견뎌야 했다.
이들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이유는 대부분 경찰의 강압 수사가 있었고 이로 인해 이들이 허위 자백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경찰은 증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수사를 진행하지 않고 범인을 정해놓고 증거를 범인에 맞췄다. 자백을 증거의 왕으로 삼았고 보강 증거는 이에 맞추거나 필요하면 조작했다. 검찰은 방임하거나 조장했다. 그러나 강압 수사에 가담한 경찰이나 검사가 형사 처벌을 받은 사례는 극히 드물다.
앞으로 이런 일들이 다시 생기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결국은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라는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이 실현되는 재심제도에 대한 전반적인 개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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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