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유엔(UN)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3주년을 규탄하는 연례 결의안 무산을 시도하며 러시아의 전쟁 책임을 언급하지 않는 자체 결의안을 제출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종전 정상회담이 임박한 가운데 미국이 점점 러시아 입장으로 기울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광물 협상은 막판 진통을 이어가는 가운데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전쟁 지원 대가로 5000억 달러를 요구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2일(현지시간) 입수해 보도한 외교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유럽의 유엔 회원국들을 상대로 러시아의 전쟁 책임을 규탄하는 우크라이나의 결의안에 반대한다고 밝히며, 유럽이 우크라이나를 설득해 결의안을 철회하도록 압박했다.
미국은 또 우크라이나의 결의안이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 상정될 경우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취지로도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지난 21일에도 우크라이나에 직접 결의안 철회를 요청했지만, 우크라이나는 이를 거부했다. WSJ는 “이번 갈등은 미국과 러시아가 한편에,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다른 편에 서면서 최근 몇 년간 가장 극적인 ‘대서양 긴장’으로 이어졌다”고 전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제출한 결의안과는 별도로 자체적인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결의안에는 분쟁의 ‘신속한 종결’과 함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분쟁 전반에 걸친 비극적인 인명 손실을 애도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전쟁(war)’ 대신 ‘분쟁(conflict)’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데다, 결의안에는 전쟁을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고 러시아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성명에서 별도의 결의안 제출 사실을 밝히면서 “미국의 최우선 과제는 전쟁을 끝내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유엔 회원국이 이 엄숙한 노력에 동참하기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전쟁 발발 3주년인 24일 유엔 안보리에서 자체 결의안을 표결에 부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미국과 종전 협상 중인 러시아는 미국의 결의안을 지지할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유엔 193개 회원국 중 유럽을 포함한 100여개국은 유엔 총회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결의안을 지지한다는 입장이다. 우크라이나의 결의안은 전쟁 범죄에 대한 러시아의 책임을 묻고,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무조건 즉시 철수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러시아를 지원하는 북한군의 전쟁 개입이 전쟁 확산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불러온다고 지적하는 내용도 담겼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는 메릴랜드주 옥슨힐에서 열린 보수정치행동회의(CPAC) 연례행사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와의 광물 협상에 대해 “우리는 희토류와 석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다른 것들을 요구하고 있다”며 “내 생각에 우리는 합의에 매우 가까이 와 있다”고 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도 이날 소셜미디어 ‘엑스’에 “우리는 모든 파트너들과 안보 보장과 구체적 지원 형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며 “안보 보장은 대다수의 유럽과 미국, 글로벌 파트너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1일에도 “우크라이나와 미국 간 광물 합의안 초안이 작성되고 있다”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광물 협상에 관한 합의가 진정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세부 사항을 바로잡는 것이다. 나는 정의로운 결과를 기대한다”고 적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은 전쟁 지원 대가로 우크라이나의 광물과 가스, 석유 등과 항구 기반 시설에서 발생한 수익의 50%를 미국이 통제하는 기금에 납입하는 내용을 담은 새 협상 초안을 제시했다. 우크라이나는 해당 기금이 5000억 달러가 될 때까지 기여해야 한다. 또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점령 지역이 해방될 경우, 해당 지역의 자원 수익 중 66%를 미국에 제공해야 한다는 조항도 추가됐다. 러시아는 현재 천연 자원이 풍부한 돈바스 지역 등을 포함해 우크라이나 영토 약 5분의 1을 점령하고 있다.
워싱턴=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