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지난 10여년 동안 수많은 참사를 겪었다. 많은 이가 세상을 떠났고 유족들이 감당한 슬픔은 우리 사회에 진한 얼룩을 남겼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참사를 기억해야 하는 걸까. 참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부산대 ‘SSK 느린 재난 연구팀’ 주윤정 교수는 최근 국민일보와 가진 화상인터뷰에서 “한국 사회는 ‘느린 재난’의 관점으로 재난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느린 재난이란 장기적인 관점에서 참사를 바라보면서 그 해법을 모색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다음은 주 교수와 가진 일문일답.
-느린 재난적 관점이란 무엇인가.
“느린 재난적 관점은 재난을 기술적·관료적 시각이 아니라 인권적인 시각에서,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회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 재난 대응은 주로 인프라 복구에 초점을 맞췄다. 예컨대 마을에 수해가 나면 다시 집을 짓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느린 재난적 관점에서는 단순한 복구를 넘어 ‘공동체의 회복을 어떻게 도모할 것인가’ ‘피해자의 고통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며 피해자 중심적인 접근을 강조한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식의 문제가 부각된 것은 세월호 참사부터다. 이전까지 재난은 불가항력적 사고로 여겨졌다.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이젠 재난을 단일한 사건이 아닌 하나의 ‘과정’으로 봐야 한다. 핵심은 재난이 남긴 영향을 장기적 시각에서 살펴보고, 피해자와 공동체의 회복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느린 재난 연구팀에서는 어떤 연구와 활동을 하는가.
“이론적 연구와 학술적인 데이터 실증 작업,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정책을 찾는다. 이론적 연구에서는 느린 재난과 관련된 이론과 개념을 정리하는 작업을 한다. 실증적 작업에서는 재난을 장기적으로 봤을 때 회복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무엇인지 분석하고 참사와 관련된 정책도 재고한다. 예를 들어 이태원 참사 때는 대학에 긴급 가이드라인을 공유했다. 현재는 아리셀 참사의 조사와 회복을 위한 위원회 활동을 하며 이 같은 재난 이후 우리 사회가 배워야 할 점을 연구하고 있다.”
-피해자의 회복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뭔가.
“회복력의 핵심은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존 상태보다 나아지는 것이다. 참사를 겪은 유족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아이는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고. 이런 사람들이 비슷한 비극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를 위해 싸울 때 회복이 가능하다. 참사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이 중요하다. 대부분 참사는 명확한 가해자 한 명이 존재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세월호·이태원·아리셀 참사와 이번 대전 초등생 피살 사건 등은 시스템이 ‘역할’을 했다면 막을 수 있는 재난이었다. 참사를 경험한 뒤엔 명확한 진상 규명을 통한 ‘배움’이 있어야 한다. 바뀌는 게 있어야 피해자 회복이 가능하다.”
-철저한 진상 규명을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사건의 과학적, 보관학적, 언론적 시각을 담아 사회학적 책임을 제시하는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9·11 테러 관련 보고서는 사회적으로 논의가 필요한 부분과 연대 방법 등이 방대하게 담겨 있다. 이처럼 참사에 대한 종합 보고서를 만들어 고쳐져야 할 것들이 책임 있는 기관들에 의해 실제로 이행되는 체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서 벌인 조사를 바탕으로 정부가 할 일을 권고한다. 하지만 권고 사안을 제대로 이행했는지 감시하는 기구가 없다.”
-대전 초등생 참사를 느린 재난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피해자 아버지 인터뷰를 봤다. 아무도 자신에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얘기를 안 해줬다는 말씀을 하시더라. 참사가 발생한 순간부터 유족은 그 상황을 실시간으로 겪으며 끔찍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이 경우 유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경찰 등은 신속하게 유족을 상대로 수사 진행 과정을 알려줘야 한다.”
-참사 이후엔 유족을 향해 공격을 퍼붓는 사람이 많다.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참사 유족의 연대나 보상금 수령 과정을 ‘이윤을 취하는 행위’로 여기는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의 크기보다는 오로지 그들이 얻게 되는 것에만 초점을 둔다. 이에 대해서는 사회 공동체가 반성해야 하고, 잘못된 프레임은 깨트려야 한다. 다만 사회의 모든 이들이 악하다는 태도를 가질 필요는 없다. 미디어에 나오는 목소리는 소수다. 항상 극단적인 의견이 과잉 표상된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이 슬퍼하고 유족에 연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목소리를 잘 대변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극단적인 발언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강력한 형사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
-심리적 지원 등과 같은 유족에 대한 사후 조치가 잘 이뤄지고 있다고 보나.
“국가 트라우마 센터처럼 심리 지원이 여러 방식으로 제도화되고 있지만 지역별 편차가 크다. 너무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지방에 있는 분들은 더 큰 고통을 겪고 있고 참사가 ‘기억의 문화’로 이어지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또한 사회적·경제적 자원이 있는지에 따라 ‘회복의 빈부격차’가 나타난다는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 연구를 위해 만난 한 유족은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민이었는데 의지할 사람이 아내밖에 없었다. 그는 참사로 아내를 잃은 후 아무도 없는 집으로 들어갈 수 없어 계속 농성장에 있겠다고 했다. 이처럼 주변에 지지망이 없는 이들은 국가와 사회가 그들의 일상 복귀를 돕는 버팀목을 찾아줘야 한다.”
-현재의 재난 대응 체계는 어떤 방향으로 개선돼야 하나.
“보통 재난 대응 체계는 6개월 동안 운영된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여전히 심각한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을 지속적으로 살피고 지원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피해자 중심적 관점이란 재난이 발생했을 때 공공기관이 매뉴얼대로 대응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아리셀 참사 유족 인터뷰를 분석해 보면 누구도 유족에게 그들의 가족이 왜 희생됐는지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또 참사 발생 직후 유족은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혼란을 겪는다. 한 유족은 ‘여러 사람이 와서 보상금 신청을 비롯해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유족에게 정확한 정보를 납득 가능하게 전달할 방법을 더욱 섬세하게 고려해야 한다.”
-반복된 참사를 통해 한국 사회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보나.
“유족들이 변화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싸웠다는 점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이러한 움직임이 두드러졌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로 정치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생겼고 이는 강력해 보이던 정치 권력을 붕괴시켰다. 참사를 사회적 책임, 공공성의 영역에서 다루게 됐다. 책임자는 본인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경고의 메시지도 계속해서 전달됐다. 유족의 연대와 용기가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을 발전시키는 핵심 기제가 된 것이다.”
-느린 재난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바라는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책임감이 높아지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최근 희귀난치성 질환을 가진 신입생이 들어왔는데, 그 친구가 이동이 힘들어 학교 측에 차량 제공을 검토해 달라고 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에는 정당한 편의 제공을 하라고 명시돼 있지만 그 지원이 어디까지인지는 모호하다. 법과 제도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핵심이다. 각자 맡은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실천하고 강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한국 사회에 ‘사회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길 바란다.”
박상희 박주원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