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비디오 아트를 보는 듯한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태초의 땅이 사라졌다가 다시 생기고, 인간들은 집터를 다지기 시작한다. 시간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살던 1700년대를 지나 20세기 초로 넘어온다. 아들 리처드(톰 행크스)를 가진 로즈(켈리 라일리)와 전역 군인 알(폴 베타니) 부부가 집을 얻는다. 가족의 이야기는 여기(here)에서부터 시작된다.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등을 휩쓸고 국내에서도 인기를 끈 영화 ‘포레스트 검프’(1994)의 배우와 감독, 제작진이 다시 뭉친 영화 ‘히어’가 19일 개봉한다. 영화는 하나의 집(터)를 배경으로 인류의 역사가 시작한 시점부터 근현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을 따라가며 이 곳에 살아 온 사람들의 서사를 담는다.
고등학생이 된 리처드는 여자친구 마가렛(로빈 라이트)을 집에 데려와 가족들에게 소개한다.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보내도 된다”는 리처드에게 마가렛은 “남은 인생을 여기서 보내고 싶어”라고 답한다.
얼마 후 두 사람은 거실 벽난로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며 인생이라는 거대한 모험을 이 집에서 함께 시작한다. 리처드는 예술가를 꿈꿨지만 안정적인 가정을 만들기 위해 꿈을 포기하고, 마가렛은 변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이 집에서 대가족을 부양하는 데 헌신한다.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 톰 행크스와 그의 첫사랑 제니 역을 맡았던 로빈 라이트는 30년 만에 만난 이번 작품에서 편안한 호흡을 선보인다. 두 주인공은 10대부터 80대까지 폭넓은 연령대를 연기한다. 배우들의 외모는 인공지능(AI) 기반 시각효과(VFX) 기술을 활용했다. 디지털 메이크업 기술을 통해 배우들의 얼굴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인물의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해 여운을 준다.
기억을 모두 잃어가던 마가렛이 옛 집에 돌아와 어린 딸 바네사가 잃어버려 찾아다니던 소동을 떠올리며 “그래, 내가 소파 사이에서 찾았었어. 다 기억나. 난 여기를 좋아했어”라고 말하는 장면은 뭉클하다. 마가렛은 가족들과 보낸 특별할 것 없었던 하루하루, 세월에 닳아 낡고 소박해 지겹기까지 했던 집이 삶을 지탱하는 큰 힘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빽 투 더 퓨처’(1987), ‘콘택트’(1997), ‘캐스트 어웨이’(2001) 등을 연출한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은 이번에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 앵글 위로 시간대의 프레임이 겹쳐지는 신선한 구성을 선택했다. 관객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CCTV 화면을 보는 듯 거실 전체를 조망하는 앵글로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저메키스 감독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알게 되는 데에는 평생에 걸친 영화 제작 경험이 필요했다”며 “카메라가 하나의 위치에서 수 세기에 걸친 이야기를 다룰 때, 모든 장면은 그 프레임 안에서 완벽히 동작해야 한다”고 연출 의도를 말했다.
같은 자리에서 인물, 가구, 사건 등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이 방식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족의 사랑과 그 안에 담긴 아련한 감정을 고스란히 전한다. 오랜 세월 함께 해 온 사람과 같이 보면 더욱 감동적일 영화다. 러닝타임 104분, 12세 이상 관람가.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