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역사를 그린 드라마나 영화에서 여성들의 이야기는 단골 소재다. 남성이 주인공이었던 역사 속에서 한두 줄의 기록으로 남은 경우가 많아 상상력을 덧대기 좋아서다. 그간 선덕여왕, 장희빈, 황진이, 명성황후 등 많은 역사 속 여성들이 매체에 등장했지만, 태종 이방원의 아내이자 세종대왕의 어머니였던 원경왕후를 전면에 내세운 건 없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원경’은 역사적 인물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 사랑에 초점을 맞춘 일대기를 그려 주목받았다.
파격적인 설정과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 배우들의 호연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끌었지만, 단연 돋보인 건 원경왕후를 연기한 차주영이다. 그는 중후한 목소리와 태도로 기품 있는 왕비의 모습을 그려내 호평받았다. 지난 13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차주영은 “예쁜 모습을 보이려는 욕심은 없었고, 왕후로서의 모습만 잘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드라마 내내 왕비를 흉내 내는 것처럼만 보이지 않았으면 싶었다”며 “왕관의 무게를 온몸으로 체감했던 작품”이라고 회상했다.
‘원경’은 고려시대를 끝내고 조선을 연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과 그의 아내인 원경의 사랑 이야기와 정쟁 등 역사를 다룬 퓨전사극이다. 정치적 동반자였던 두 사람의 치열한 애증 서사를 원경왕후의 시점에서 풀어냈다는 점이 기존 작품들과 달랐다.
차주영은 “(대본을 받고)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내가 해야지’ 생각했다. 물론 ‘원경’은 퓨전사극이지만 실존 인물을 다룬, 역사 기반의 클래식한 사극을 늘 해보고 싶었다”며 “무엇보다도 원경왕후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은 ‘원경’이 처음이었다는 점이 끌렸다. 단순히 여성 서사라서가 아니라, 원경이란 인물의 최초를 그린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저희 할머니가 (원경왕후와 같은) 여흥민씨셔서 저만 아는 그런 자부심도 있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차주영은 원경왕후가 이방원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어린 시절부터 왕비가 되고, 나이가 들어 죽는 시점까지의 일대기를 모두 그렸다. 젊은 시절의 푸릇함과 중년의 중후함, 노년이 된 왕후의 고단함까지 다채롭게 담아내 ‘차주영 아닌 원경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들었다.
하지만 이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4~5㎏에 달하는 가채를 내내 머리에 지고, 네다섯겹 되는 한복을 입은 채 하루 종일 촬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차주영은 “숨도 잘 안 쉬어지고 몸이 제 기능을 못 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짓눌렸던 것 같다”며 “사극에 대한 동경심이 커서 견뎠던 것 같다. 끝나면 그리워질 걸 알았지만 점점 힘에 부치니까 나중엔 ‘언제 끝나나’ 싶더라”고 토로했다. 차주영은 ‘원경’을 촬영하며 잇몸이 무너지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목 디스크가 오기도 했다.
고생을 많이 한 작품이었지만 ‘원경’은 방영 초기부터 노출과 역사 왜곡 논란 등으로 홍역을 치렀다. 이에 대해 차주영은 “노출 연기를 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촬영 전 많은 논의를 했고,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했지만 모두가 만족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며 “역사 왜곡 논란이 있었던 건 안타깝다. 역사 재현보다는 다른 관점으로 인간의 감정을 해석하려 했고, 끝까지 봐주시면 저희가 어떤 시도를 하려 했는지 알아봐 주실 거라 생각해 기다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더 글로리’의 최혜정으로 눈도장을 찍은 그지만, 차주영은 ‘원경’으로 터닝포인트를 마련했다. 차주영은 ‘원경’을 통해 얻은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눈물을 글썽이며 “‘원경’을 통해 인생을 배운 것 같다. 한없이 겸손해지고 여러 생각이 들더라”며 “방영되고서 ‘애썼다’, ‘고민 많이 했겠네’ 소리만 들으면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 얘긴 들은 것 같아 만족한다. 연기적으론 아쉬운 게 많지만, 내 모든 걸 다 쏟았다”고 말했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