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모든 장면에 있지만, 앞에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진 않는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옆에서 고민을 들어주고, 꽉 묶여있던 실뭉치의 끝부분을 살짝 풀어줄 뿐이다. 그러면서도 일과 가정을 완벽하게 케어해내는 능력자다. 매주 금, 토요일 저녁 시청자들이 ‘유은호앓이’를 하게 만들었던 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의 남자 주인공 유은호 얘기다.
이준혁은 공기 같은 역할의 유은호를 맞춤옷을 입은 것처럼 소화했다. 왜 이런 로맨스를 자주 안 했느냐는 시청자들의 볼멘소리가 SNS를 달굴 정도였다. 이준혁이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은 건 ‘나의 완벽한 비서’가 처음이다.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준혁은 “늘 작품을 할 때면 부담이 있는데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며 “지금은 사람들이 로맨틱코미디를 좋아하는 시대가 된 것 같다. 역시 (주변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하나 싶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준혁은 그동안 많은 작품에서 유은호 같은 역할을 맡아왔다.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데 꼭 필요한 감초지만, 절대 이야기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는 그런 인물 말이다. 그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큰 계기가 됐던 ‘비밀의 숲’ 서동재도 비슷하다. 그래서일까, 주인공이지만 주인공 같지 않은, 소리 없이 강한 유은호가 이야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유은호를 이준혁은 밴드 음악의 베이스 같은 역할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 작품은 배우들의 합이 중요한, 재즈 같은 작품이다. 그 사이에서 은호가 갑자기 메인 보컬로 나서면 안 될 것 같았다”면서도 “늘 리액션만 해서 매력이 없을까 봐 중간중간 개그를 넣는 식으로 변칙을 줬다. 예상치 못한 행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리듬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이준혁은 강렬하거나 독특한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클리셰(상투적인 표현) 비틀기를 좋아하는 그의 취향 때문이다. 비리 검사, 악당, 짝퉁 히어로 같이 흔치 않은 캐릭터들 속 완벽한 남자 주인공 유은호는 그의 필모그래피 속 ‘클리셰 파괴범’이 됐다. 이준혁은 “제 필모그래피엔 독특한 캐릭터가 많아서 독특한 인물들이 더 이상 독특해 보이지 않았다”며 “오히려 유은호가 독특했다. 또 주변 친구들 중에 결혼하고 육아하는 경우가 없다 보니 호기심도 생겼다”고 말했다.
어느덧 데뷔 18년 차가 된 그지만, 그를 규정하는 단 하나의 이미지 혹은 장르를 꼽는 건 어렵다.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그는 어떻게 평가할까. 이준혁은 “어릴 때 제 로망은 작품 속에서 캐릭터만 남아 모두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였다. 하지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가 많아진 만큼,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할 때 ‘나만의 메뉴’가 없으면 살아남기가 힘들어진 것도 사실”이라며 “‘제대로 된 맛집’이 있는 배우들이 부럽기도 하지만, 저처럼 업종 변경을 계속해야 하는 사람도 있는 것 아니겠나. 앞으로도 (제작자들이) 얼마든지 저를 변주해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이준혁은 지난해 영화 ‘소방관’과 드라마 ‘좋거나 나쁜 동재’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드라마 ‘광장’, ‘레이디 두아’, 영화 ‘왕과 사는 남자’ 등 여러 작품의 캐스팅 소식도 전해졌다. 전성기를 맞은 소감을 묻자 그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제 삶은 ‘오징어게임’ 같은 생존게임 같다”고 답했다. 새로운 역할과 이야기에 대한 목마름도 여전하다. 그는 “저는 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본다. 그래서 작품에 뛰어들 때도 ‘누군가는 봐주겠지’ 하는 마음”이라며 “그렇게 하면서도 오래 일했으니 후배들에게 ‘실패해도 계속할 수 있다’는 표본이 되지 않겠나”라고 웃었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