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기도로… ‘기독교인’ 윤동주로 하나된 한일 대학

입력 2025-02-17 00:10 수정 2025-02-20 16:45
16일 교토 도시샤대학 클라크 채플 인근에 위치한 시인 윤동주 시비에 놓인 고인의 사진들과 윤동주가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대학에서 공부할 당시 지녔던 영어 신약성경(왼쪽부터). 도시샤대학 한국교우회, 윤동주기념관 제공

16일 일본 개신교 역사상 가장 오래된 예배당인 교토 도시샤대학 내 ‘클라크 채플’(예배당)에서 시인 윤동주를 위한 기도가 울려 퍼졌다. 기독 대학인 도시샤대학이 개최한 윤동주 명예문화박사 증정식에서다. 이틀 전인 14일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열린 윤동주 서거 80주기 추모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따온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라는 같은 교훈을 가진 한일 두 기독 대학은 재학생이자 기독교인이던 윤동주의 서거 80주년을 추모하기 위해 마음을 모았다.

이날 도시샤대학의 명예문화박사 증정식은 와다 요시히코 기독교문화센터소장의 에베소서 2장 14~16절봉독과 기도로 시작됐다. 와다 소장은 “한국의 국민적 시인 윤동주가 이루어낸 문화창작 활동의 지대한 공헌을 기리고 표창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이게 하신 놀라운 은혜에 감사드린다”며 “그에게 명예문화박사 학위를 증정하게 된 것은 도시샤 대학에게 있어 매우 영예로운 일”이라고 했다. 1875년 설립 이후 이 대학이 고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윤동주의 장조카이자 유족 대표로 행사에 참석한 윤인석(왼쪽)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16일 교토 도시샤대학에서 열린 윤동주 명예문화박사 증정식에서 학위 증서를 받고 있다. 도시샤대학 한국교우회 제공


고하라 가쓰히로 총장은 “일본 사회가 전후 80년을 되돌아보면서 그 역사 속에 시인 윤동주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역사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면서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고자 한다”며 “명예학위 증정이 그 소중한 한 걸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했다.

윤동주의 장조카이자 유족 대표로 행사에 참석한 윤인석(왼쪽)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16일 교토 도시샤대학에서 열린 윤동주 명예문화박사 증정식에서 학위 증서를 받은 뒤 기념촬영에 응하고 있다. 도시샤대학 한국교우회 제공

도시샤대학 정 가운데에 위치한 클라크 채플. 이곳에서 16일 윤동주 명예문화박사 증정식이 개최됐다. 도시샤대학 국제협력추진기구 서울사무소 제공

이날 학위는 윤동주의 장조카이자 유족 대표로 행사에 참석한 윤인석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받았다. 윤 교수는 “큰아버지의 일본어 번역 시집이 1984년 11월에 출판되고 1995년 2월 도시샤대학 캠퍼스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때 도시샤대학에서 큰아버지를 기리며 주신 표창장을 대신 받았던 기억이 있다”며 “표창장을 받은 지 30년 지난 오늘, 도시샤대학에서 큰아버지께 명예문화박사학위를 수여하신다는 소식을 들으며 큰아버지가 하늘에서 가장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시가 속한 ‘문학’이 아닌 한 시대의 인간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문화’ 분야에서의 학위라는 점이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며 “큰아버지의 유업과 유지를 잘 기념해 주시고 소중히 여겨 주시는 도시샤대학과 구성원 여러분들의 양육 간 강건하심과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16일 교토 도시샤대학 클라크 채플 인근에 위치한 시인 윤동주시비에 놓인 고인의 사진들. 도시샤대학 한국교우회 제공


윤동주는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졸업 이듬해인 1942년 4월 도쿄의 릿쿄대학 입학했다. 그해 10월 도시샤대학으로 편입했다. 1943년 7월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체포돼 2년 뒤인 2월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도시샤대학은 이날 예배당 인근 윤동주 시비에서 헌화식을 열고 고인을 추모했다. 진창수 주오사카 총영사, 주호영 김희정 김용태 국민의힘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김성환 의원이 함께했다.

주호영 김용태 의원 등이 16일 교토 도시샤대학 클라크 채플 인근에 위치한 시인 윤동주시비에서 헌화하는 모습. 도시샤대학 한국교우회 제공


이번 행사에 참석한 도시샤대학 한국교우회 조재국 회장은 “14일 저녁 고하라 총장 등과 한 자리에서 이번 명예문화박사 학위에는 ‘윤동주의 문학에 대한 평가와 학교가 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반성과 사죄가 의미가 담겨있다’는 설명을 들었다”며 “학위 수여식이 아닌 증정식이라고 표현한 것도 주는 사람이 중심이 아닌 받는 이에 대한 존경의 의미가 크게 담긴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증정식 전날인 15일 마이니치신문에서도 1개 면에 윤동주의 명예박사 수여에 대한 내용이 보도될 만큼 현지에서의 관심이 크다”고 귀띔했다.

16일 교토 도시샤대학에서 시인 윤동주 명예문화박사 증정식과 관련한 보도가 실린 전날 마이니치 신문. 도시샤대학 한국교우회 제공


앞서 연세대 윤동주기념사업회와 문과대학은 14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내 루스채플에서 80주기 추모식을 개최했다. 윤동섭 연세대 총장과 유가족 등 참석자는 찬송가 ‘어느 민족 누구게나’에서의 ‘진리 따라 살아갈 때 어려움도 당하리’라는 가사를 함께 불렀다. 정미현 교목실장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내용이 담긴 요한복음 12장 24~25절을 봉독했다.

원로 가수이자 윤동주의 6촌 동생인 한국해비타트의 윤형주 이사장은 유족 대표로 이날 추모사를 전했다. 윤 이사장은 “기독교를 통해 근대의 물결을 받아들이는 길목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집안 모두가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며 “저와 유족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이’ 살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되새기며, 언제가 흔들리지 않고 신앙 안에서 꼿꼿하게 살아내고자 다짐한다”고 했다.

14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열린 80주기 추모식에서 윤동주의 6촌 동생인 윤형주 한국해비타트 이사장이 추모사를 전하고 있다. 연세대 제공


연세대는 1955년부터 매년 2월 윤동주 추모회를 열어왔다. 올해부터는 특별히 윤동주의 고종사촌으로 그와 같은 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인 송몽규 선생에 대한 추모도 함께할 것을 알렸다. 윤 총장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믿음이 점차 희미해지는 시대에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선생의 정직하고 청렴한 의지는 연세대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추모식에 앞서 연세대 윤동주기념관 인근 윤동주 시비 앞에서는 헌화식이 열렸다. 연세대는 2020년부터 핀슨관 전체를 윤동주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육필 원고와 소장 도서, 유품 등 유족의 기증과 박은관 시몬느 회장 등 동문 후원 등으로 완성됐다. 특히 윤동주기념관에는 기독교인인 윤동주의 영문 신약성경이 전시돼 있다.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그가 성경공부 모임에 항상 지니고 다녔다. 마가복음엔 구원의 복음, 예수님 고난과 박해,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그의 메모가 남아있다. 또 팔복, 십자가, 또 태초의 아침, 눈감고 간다 등 그의 시에는 성경적 내용이 담겨있다.

연세대 내 윤동주기념관에 전시된 시인 윤동주의 영문 신약성경. 윤동주기념관 제공


이번 명예문화박사 학위에는 기독교인이자 신학과 교수 출신의 고하라 총장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시샤대학 국제협력추진기구 서울사무소의 최순육 소장은 “유치원부터 중학교, 여자대학에 이르기까지 규모가 큰 학교법인이기에 의사 결정에는 여러 번의 이사회를 거쳐야 하는데 고하라 총장이 ‘양심을 중요하게 가르치는 대학으로써 재학생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양심을 회복해야 하지 않겠냐’는 주장을 강하게 펼쳐서 안건을 통과시켰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16일 교토 도시샤대학 입구에 설치된 시인 윤동주 명예문화박사 증정식 알림판. 도시샤대학 한국교우회 제공


연세대와 도시샤대학은 기독교 대학으로 긴밀하게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것은 물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따온 교훈도 같다. 14일 연세대 교목실에 따르면 도시샤대학 관계자들이 지난해 9월과 10월 입시 관련 사안으로 연세대에 방문했을 당시 교목실의 제안으로 윤동주기념관을 관람했다. 정미현 교목실장은 “관계자들이 관람 후 깊은 감명을 표현했고, 교토로 돌아가서 ‘윤동주의 시가 몇 개의 언어로 번역됐는지’ 등 자세한 질문을 담은 이메일을 여러 차례 보내왔다”고 전했다. 그로부터 2개월 뒤 윤동주 명예문화박사 학위 소식이 전해졌다. 정 교목실장은 “참회와 고백을 전제로 한 기독교 정신이 발휘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화해의 시도라는 점에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윤동주를 연결고리로 두 기독교 대학의 교류는 더욱 활발해질 예정이다. 연세대는 오는 7월 도시샤대학에서 윤동주 연극을 올릴 계획이다. 올해 초에는 연세대 학생들이 도시샤대 등 윤동주의 일본 유학지를 찾아 강의를 듣는 등 첫 학생 교류가 시작되기도 했다.

1942년 8월 4일 윤동주(오른쪽 맨 위)가 고향인 용정(중국 지린성 룽징시)에서 찍은 사진이다. 일본 유학 중이던 윤동주는 여름 방학 동안 잠시 귀국해 고향 마을에서 함께 자란 또래 친척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이 사진은 그가 고향에서 남긴 마지막 사진이 됐다. 윤동주기념관 제공

신은정 기자 sej@kmib.co.kr